경적이 울려도 너무 울리는 우리나라의 '조급함'에 대하여
언젠가 그런 영상을 sns에서 본 적이 있다. 아마 여러분들도 한 번씩은 보았을 텐데, 어미 오리를 따라서 아기 오리들이 차도를 횡단하는 장면. 그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졸이게 하는데, 그것은 '위태로움'에서 오는 숨 막힘이다. '빠르게 빠르게'만 달려 나가는 차들을 피해 오리들이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내가 본 영상에서 오리들은 다행히 안전하게 횡단에 성공하였고, 나도 안심하고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고사리손을 바로 어제 벗어난 꼬맹이의 팔 하나 그리고 둘 그리고 셋. 엄마를 따라 꼬마들이 보도를 횡단한다. '빨리빨리' 쌩쌩이들은 벌써 저만치 빠져나가고, 오호! 그들 앞에 멈춰 선 경찰차에서는 사이렌이 노래처럼 울리며 아이들의 횡단을 응원한다. 목표를 완수한 아이들은 경찰에게 고마움의 허리를 굽히고, 이번엔 경찰관이 마이크를 켜서 '안녕! 잘 가!' 한다.
100일쯤 전이다. 후쿠오카를 여행했다. '가깝지만 먼 나라' 이 오래된 수사는 역사적 관계에 한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곳과 나의 이곳은 도로교통부터 많은 것이 달랐다. 일본 여행을 자주한 친구가 하카타며 텐진의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
"경적을 전혀 안 울리지?"
그랬다.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내에 차가 그렇게 많았는데 경적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그 소리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도 울리지 않았다.
다시 여기는 한국, 읍단위 인구가 10만 명쯤이라고 하는 곳의, 구도심의 작은 사거리. 그곳에 나는 작게 위치한 소매점의 파트타이머다. 아침 6시에 가게 문을 열고 물건을 진열하고 팔기도 하고, 떼오기도 한다. 정오까지. 후쿠오카 여행도 알바를 시작하고 조금 지나서 다녀왔으니, 기간은 대략 100일이 넘어간다. 그 시간 동안 같이 일 하는 부장이모가 나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저차는 왜 이렇게 빵빵대는 거야!"이다.
궁금해졌다. 내가 하루에 듣는 경적소리는 몇 번이나 될까?
경적소리 측정 결과
시간 : 2023년 8월 9일 오전 10시-11시
장소 : 구체적 장소 비공개. 다만, 1차선 도로가 교차하고 횡단보도 2곳 그리고 반경 50m 안에 마트 있음.
경적 횟수 : 11번
횟수는 생각보다 적었다. 실제로 세어보기 전에는 100번/1시간은 아닐까 했다. 휴가시즌이라 그런가, 평소보다 차들이 적었다. 하지만, 11번의 경적 속에서 위급상황이나 신호변경 알림(이곳은 원래 신호등 자체가 없음)은 없었다. 도로교통범과 도로준수사항에서, 경적은 위 두 가지 경우에 필요하다고 적혀있다. 그래서, 그래도 생각해 본다. 왜 우리나라는 경적을 많이 울리게 되었을까?
11번의 경적이 울리는 경우는 모두 앞의 차에게 빨리 가라는 경우였다. 병원에 오는 할머니가 내리는 택시 뒤에서 빵빵, 비보호 좌회전을 대기 중인 차 뒤에서 빵빵, 보행자의 횡단을 위한 정차의 뒤에서 빵빵.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 모르겠지만 경적은 충분히 양해 가능한 상황에서 울렸다. 이것은 어떤 강박적 조급함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것은 '빨리빨리'라는 단어를 불러낸다. 대한민국의 '빨리빨리'는 꽤나 유명하다. 알바를 하며 선 만난 외국인 형한테 '빨리빨리'를 언급하면 무엇인가 이해할 수는 없다는 눈으로, 계속된 강요에 의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쓴웃음이, 그의 얼굴에 인다.
우리나라의 '빨리빨리'는 급격한 산업화와 원인이자 결과이다. 몇 백 년을 이어온 중세적 봉건체제가 굴욕적인 제국주의의 식민지 시대로 막으로 내리고 '근대화'는 이 땅의 병적 콤플렉스가 된다. 다른 나라보다 뒤처진 근대화 때문에 우리보다 못하다고 여기던 옆나라의 식민지를 경험하고 타의에 의한 해방 이후 이어진 동족상잔. 그 폐허의 시절, 우리는 '빨리빨리'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고, 그 방법은 무엇이든 '빨리빨리' 하는 것이었다.
'빨리빨리'는 대한민국을 아시아의 비상하는 몇 마리 용 중에 한 마리로 만들어 주었고,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가장 빠르게 원조를 하는 나라로, 경제적/자본적 수치들로 하여금 세계 몇 위의 자동차/철강/선박 수출국 등의 타이틀을 20세기 후반에, 세계 인터넷 보급률 1위라는 타이틀은 21세기 초반에 획득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빨리빨리'는 대한민국의 대표 유전자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빨리빨리'가 한 일은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라는 문장을 대한민국에서 지워버리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이 지난 온 반세기의 시간은 어떻게든 입에 무엇인가를 집어넣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절이었다. '빨리빨리'의 결과,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국민은 삼시 세 끼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위대한 결과이다. 하지만 그 위대함을 위해 무시했던/무시됐던 것들의 청구서가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벌써 10년 전부터.
'빨리빨리' 유전자의 본질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아마 '효율극대화'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비용절감'을 통한 최대한의 '이익추구'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추구된 이익은 삼시 세 끼를 제외하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유산 말고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은 없을까?
"2016년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열차에 치여 숨진 19세 청년 '구의역 김 군', 2018년 발전소 기계에 끼여 삶을 마감한 24세 김용균 씨, 그리고 2022년 가을 SPC 계열사 빵 공장에서 소스를 배합하다 상반신이 끼어 사망한 23세 여성노동자"_출처_오마이뉴스_'17시간 일하며 햄버거 하나 먹었다는 아이, 눈앞이 아찔했다'_23.08.03
'빨리빨리'가 앗아간 것은 다름 아님 우리의 목숨이다. 극단적인 예시만 찾아낸 것일까? 그렇다면 300명이 넘은 아이들이 탄 배가 비용절감과 최대한의 적재를 위해 불법 변경되어서 바다에 가라앉은 일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시민의 안전에 봉사한다는 경찰들이 서로를 죽음까지 몰고 간 용산의 일은? 더 극단적인 예시인가? 오해하지 말자.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극단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자극적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일상의 극단들, 통계조사에 조차 기록되지 못하는 극단들은 얼마나 많을까. 내 조카가 탄 배가 차디차게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고, 내가 벌어먹는 곳이 언제 강제철거를 당할지 모른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어느 신에게서도 보장받지 못한다
다시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으로 돌아가보자. 횡당보도 앞에 아이들이 서 있는 모습은 경찰차에서만 보였을까? 아이들을 우두커니 세우고 빠르게만 빠르게만 달려 나간 자동차들은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간 것일까? 중요한 것은 그 자동차들은 자신이 빠르게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자신에게 익숙한 속도로 차를 몰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표 유전자는 '빨리빨리'이니까.
이제는 속도를 줄일 때가 되었다. 아니, 벌써 액셀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을 시기가 한참 지난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야 하는 세상은, 차창 앞 횡당보도를 아장아장 지나가는 아이들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세상이다. 더 이상 일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끼니를 놓치지 않는 세상이다. 극대화된 효율로 최대화된 수익이 모든 것의 앞에 서지 않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제 우리는 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사회 구조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법이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방법들을 말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글의 맥락과도 맞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빨리빨리'를 그만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법과 문화를 통해 한꺼번에 확 바뀌는 것 역시 '빨리빨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뇌종양에 걸린 소매치가가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나온 말이다. 세상을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면 세상은 나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이건 어떤 금욕주의적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착하기만 하라고, 양보만 하라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 얼마나 스스로를 여유롭게 바라보았는가, 그런 여유로 내 가족에게 동료에게 버스기사님에게 식당서버선생님에게 어떤 다정함을 보였는가. 그리하여 나에게 얼마나 다정하였는가.
이 글을 시작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는 오늘까지 보름이 더 흘렀다. 그간 나도 여러 번 경적을 울렸다. 습관적으로 들끓어 오른 분노를 참지 못해서. 하지만 비 오는 어느 날, 빗물샤워를 걱정하며 우산으로 비껴든 사람들이 걷고 있는 보도 옆을 차로 지날 때, 속력을 낮추고 웅덩이를 조금이나마 돌아서 지나가기도 했다. 기분이 좋았다. '빨리빨리'를 이제 그만 떠나보내는 일이란, 아마 이런 작은 것들이지 않을까. 한 번, 두 번 그렇게 세 번 정도 속력을 낮추어보는 것, 두어 번 정도 살짝 돌아서 목적지에 가보는 것. 그렇게 여유에서 오는 다정함을 맛볼 때, 꼬맹이들이 마음껏 보도를 횡단하면서 경적소리가 아름다운 피리소리로 흘러가는 세상이 시작할 것이다.
p.s_'무재칠시'라는 말도 적어놓고 싶다. '무재칠시' 가진 것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온화한 낯빛, 따듯한 눈빛, 공손한 말투, 따뜻한 마음가짐,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몸을 쓰기, 내 자리 양보하기, 나의 공간을 나누기. 우리가 8살에 배운 '바른생활 어린이'에 나오는 행동들. 공통점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여유롭게 대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그리하여 '다정' 한 것.(영화 '에에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