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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hi Sep 25. 2023

사랑의 가능성의 시작

끝을 내지 못하는 글에서, 우리가 겨우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때.

백로도 지나고 추분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절인데(추분도 지나고 추석이 왔다. 왜 글은 이리 묵혀지는가), 여러 방송사 기상캐스터들이 하나같이 같은 멘트로 하루를 열어준다. '아침저녁은선선한가을이지만한낮에는기온일30도를넘어블라블라블라.' 언제부터고 머리 한 켠에 메모해 놓은 단어, 고등학교였나, 중학교때인가 배운 '사막화'라는 말, 자주 떠오른다. 해가 뜨고 질 무렵의 수은주와 그림자가 최고로 짧아지는 그것의 하루 기온차가 매우 큰 폭을 보이는 사막.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그리고 기후위기 그리고 끝내 전지구의 모든 대륙이 모래로 변하고 먼지로 사라지는 일.


그래도 아직은 가루까지는 멀다, 하는 습관적 감각속에서(실제로는 몇 년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30도의 여름인 가을에 오아시스를 찾듯 동생과 구암막국수에 들렀다. 30도 햇살 밑에서는 냉국수들이 오아시스다. 동생과는 8년의 세월차가 있는데, 언제부터고 그냥 친구사이가 됐다. 술도 자주 마시고 다음 날 해장술도, 또 같이 마신다. 돈을 벌어서 먹고 사는 일, 정치인들 욕하기, 부모님 걱정 등등 많은 이야기를 밀도 높게 압축해서 짧게 나누는데 막국수집에서는 흘러간 사랑이야기가 테이블에 올라오게 되었다. 어떻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쩌다보니 변변치 않은 연애사를 훑게 되었고 그 와중에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어떤 생각이 일어 이 글을 쓰게된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 때, 우리는 겨우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신형철의 산문집에 30대 남자들의 20대 연애사와 그 이후 그들의 성장과 반성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태초의 환상-환멸의 시간-자기의 발견' 이라는 문장으로 정리가 되는 이야기인데, 그 글을 처음 읽었던 30대 초반에도 공감이 많이 가는 '도식'이었는데, 30대 후반이 된 지금에도 다른 느낌으로 공감이 많이 간다. '태초'의 공감은 '환상'과 그것이 무너진 후, 파도와 같이 밀려온 '환멸'에 방점이 찍혔고, 지금의 공감은 '반성'과 ‘이후의 시간’에 그것이 찍힌다.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을 해왔기 때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뿐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용서받기 위한 반성, 아니,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버린, 그런 반성 말이다."_신형철_정확한 사랑의 실험_보통을 읽고 나는 쓰네_마지막 문단


과연 반성은 있었던가? 그 반성이란 것은 그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모습들에 대한 환멸의 '확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였는가? 연애의 상대들에게 그리고 스스로 상정했던 연애의 모습에 부족했던 ‘자신’에 대해서만 반성하고, 그녀들에게는 마음 속에서만 휘돌던 정확하지 못한 미안의 감정들의 ‘표상’만 확인하고 만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이제 너에게 부족했던 나의 모습들을 안다. 그리하여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인다.'


이정도로만 정리하고 넘어 온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신형철의 저 마지막 문장의 '그런 반성'만 한 것은 아닌가.


혼자서 단단히 빛나기 위해

너무도 고운 널, 옆에 세우지 않겠어

_2015년 한 여름의 시절, 블로그에 써 놓은 글이다.


자기중심적인 욕구, 대상화 그리고 둘이 아니다

_같은 글에 2018년도 또 다른 한여름에 내가 댓글로 단 글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발행 년도는 2014년 10월. 14년과 15년의 1년의 시간과 15년과 18년의 3년의 시간. 그렇게 4년의 시간과 현재 2023년으로의 5년의 시간이 흘러, 10년의 시간이 되었다. 아마도 14년도에 신형철을 글을 만나, 그간의 연애에서 스스로에게 바라던 어떤 모습들, 연애하는 사람으로써 멋진 모습에만 집중하여 지난 연애의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그것이 상대방을 위하기 보다는 자신이 갈망하는 자신의 모습에만 집중하였기에, 연애는 끝이 나버렸다, 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리하여 나를 위해 너를 '장식'처럼 내옆에 세우지 않겠다는 성긴 결심을 하였고, 그 결심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서적들을 들춰 읽었을 것이고 그 3년의 결론이 '자기중심적 욕구' '대상화'에 대한 지양이었으리라. 이것은 쉽게 정리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둘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쓴 글에 스스로 의문이 생긴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그 내용이 헐겁게 작용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둘이 아니다' 라는 이 짧은 문장을 정리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반성’이 필요하다.


어디서부터 정확한 반성은 시작할 수 있을까. '환멸'이 어디서 시작했는지부터 점검해 보자.


환멸, 그것은 어쩌면 '나는 그녀가 사랑할 만한 사람인가' 하는 나의 '의심'에서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그 의심은 내가 그녀에게 보이는 행동에서 시작한 것인지 모르고. 가령, 그녀는 진로에 대한 깊은 고민에 숨이 가쁠 때, 나는 그녀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여 성마른 감정을 퍼부었으며, 가령, 그녀와의 내일의 약속을 뒤로한 채 오늘의 친구들과 술을 정신 없이 마셔댔으며, 가령, 나를 보듬어주려는 지금 그녀의 손길을 느끼면서 예전 그녀를 떠올리며 신음하였다.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없는 모습들, 이런 나를 저사람이 과연 진실로 사랑을 해줄까? 하는 것에서 부터 '환멸'은 시작된 것이리라. 그렇다면,


저런 행동들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정확한 반성'은?


뜨거운 만남만큼이나 진로에 대한 불안이 휘몰아치던 고2의 여름, 그아이의 불안을 함께 나누어보는 것, 나와 진로 사이이에서 휘청거리며 힘들어 했을 그아이의 마음의 한 갈피를 한 번이라도 나의 마음에 가져와 보는 일. 당장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고 답장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짜증 대신.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기 보다는 다른 이별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자신을 잡아끌었음을 알면서도, 그 가느다라한 손길로 아픔을 보듬어 주던 그녀의 진심을 한번이라도 상상해보는 일, 진심에는 진심의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것이다.

고단한 사회초년의 너와 나 사이에서 서로의 고됨에 대한 비교로 '나도 힘들어' 불친절한 말 대신 '내일 만나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분위기 좋은데 거닐면서, 우리의 내일을 기대해보자' 하는 오빠로서의 성숙한 이끎 같은 것.


이런 것 역시, 반성이기 보다는 환상이 아닐까? 아니라면, 이 반성은 우리의 지금과 내일에 무엇을 남겨주는가?


무엇이 불분명할 때, 우리는 그 무엇의 의미를 결정하면 된다. 나에게 이글의 반성은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었고, 그것은 '상대방의 세상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의지'라고 섰다. 중요한 것은 반성이, 그 정확성이 어느정도였을까,하는 것.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그 정확성을 높이려고 하는 의지를 과연 다져낼 수 있는가, 하는 것.


Ps. 이달에 초에 시작한 글이 한 달을 끌었다. 그러고도 아직, 이 글을 끝맺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실상 끝이 나지도 않았다). '둘이 아니라' 라는 말도 아직 그 뜻을 전부 헤아리지 못했다. 상대의 세상에 대한 동참은 또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 그 기준도 미비하다. 그래도 마무리를 짓는다. 완성된 이상향의 사랑의 모습이란 환상일 뿐, 우리의 사랑은 늘 반성으로 그 '사랑의 가능성의 시작'이 이루어지리라, 라는 단초를 옅게 적어놓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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