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만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자신에게 놓여져서 비로서 자유로워진다.
가을은 조금 쓸쓸하게 있는 것이 좋다. 그간 몸과 마음에 넘치던 열을 서서히 내리고 가만하게 있는다. 나무들은 이 때 마감할 준비를 한다. 옅어진 잎을 통과한 빛의 파동이 나무 아래 벤치에 누워 있는 내몸에 닿아 입자가 된다. 이내 부서진 빛의 파편이 어딘지 모를 자신의 길로 흩어진다. 힘을 빼는 가지들에 와 속삭이는 가을의 바람은 열이 식어 가는 그것이어서 서느롭지만 쌀쌀하지 않다. 나무들의 힘빼기는 단단한 나이테를 한 줄 늘리기 위함이요, 뿌리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힘을 빼는 방법으로, 지나온 자신으로, 나무는 다가올 새날을 준비한다. 그렇게 홀로 서 있는 것이다. 그런 나무들이 모여 숲이 된다. 우리가 가을에 고독해야하는 이유는 나무의 그것과 같다.
추석이 지나고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하늘이 열린 날이라고 하는데 오늘은 구름이 많다. 일주일 이상 주어진 사회적 휴식에 여기도 저기도 시끌시끌, 아시아라는 지구공간의 운동선수들이 모여 기량을 겨루는 대회와 겹쳐 연일 티브이도 함성과 휘슬. 과연 그 시끌버쩍과 함성들 속에서 아시안들은 얼마나 화목할 수 있나. 모를 일. 자신을 갈고닦아 일가를 이룬 선수들의 퍼포먼스를 보면 어떤 경이로움이 인다. 그때, 그들의 표정을 보면 모든 것이, 자신마저도 지워져 있다. 무아지경. 그들은 자신에게 놓여져서 비로서 자유로워진다.
All things are not shinning, but all the shinning things are.
_휴레트 드레이퍼스/숀 켈리_모든 것은 빛난다_마지막 문장
자신에게서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중에, 위의 문장을 매끄럽게 이해한다면 그것에 근사할 것 같아 이글을 쓴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와 성과적주체
'Just do it' 가장 유명한 광고 문구 중에 하나일 것이다. 갓 중학교에 들어가서 첫 영어 수업 때, 키가 크고 마르셨던 선생님은 우리에게 아는 영어단어를 각자 종이에 써서 내라고 하셨고, 나는 'apple'은 몰랐지만 'nike'는 알았다. 'Just do it'은 '도전'과 '할 수 있다' 라는 단어들의 바탕에서 그 빛을 뽐낸다. 그리고 그 단어들은 이시대를, 적어도 1970년대부터 관통한다. 2012년에 한국에서 출간된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등장하는 '자기착취적 성과주체' 라는 말을 나는 '도전'과 '할 수 있다'와 연관하여 읽는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subject to) 주체(subjekt)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화시켜 프로젝트(Projekt)가 된다. 하지만 주체(예속)에서 프로젝트로의 전환으로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이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Projektil)임이 드런난다.한병철_피로사회_103p
'무엇이든 도전하라, 너는 할 수 있다' 라는 문장이 우리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저 문장 속에는 도전하고 성취한 자만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라는 암묵적 메시지가 서려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실패해도 괜찮다. 다시 도전하면 된다' 라는 문장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어떤 도전에 직면하게 하면서 기어이 우리가 우리를 '착취'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렇듯 계속된 '생산성'을 요구하고 요구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착취의 악순환을 통해 체제를 유지해 간다. 그리하여 그 사회는 모두가 퍼져있는 '피로사회'가 된다. 기계가 아닌 우리가 어떻게 매번 생산성을 확보 할 수 있겠는가. 삶이 어찌 성공과 실패의 양극단으로만 나뉘어야 하는가? 삶은 그것들의 중간에서 향유하는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허우적거리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내일의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지구의 모든 생명들의 숙명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자기착취적 성과주체'는 우리 삶의 '백스테이지_개인의 영역_박진배_공간력 수업_10p'에도 침투한다. '공간력 수업'이란 책에는 우리의 삶을 타인의 시선을 느끼며 사회적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는 '프론트스테이지'와 그런 것 없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백스테이지'로 구분한다. 책에 따르면 '백스테이지'는 남의 시선이 없기 때문에 진정 자신과 가까워질 수 있고, 우리는 그럼으로써 '프론트스테이지'로 나아갈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백스테이지는 어떤가? '좋아요'를 얻기 위한 가상의 전시공간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가? 그 종속은 우리를 평일의 밥 한끼도 꼭 특별해야 하는 것 처럼 우리를 압박한다. 그 압박은 우리를 특별하다고 광고되어진 장소로 에스코트한다. 에스코트된 장소에서 우리는 물리적 허기를 채우기 보다 소비된 광고의 이미지를 먹고 올린다, 자신만의 특별한 순간을.
#모든 것이 빛나지는 않지만 빛나는 모든 것은 빛난다는 일
나의 삶이 구조적인 속박 속에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고 인정하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산으로 들어가 자신의 진정한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을 살아야하나.
우리의 삶의 시작은 우연의 결과이다. 그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죽음'에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한다. 삶의 '의미'를 나의 '의미'를.
어딘가 끄적여 놓고 잊고 지내던 문장이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가 우리에게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사회적 맥락을 통해 돌아봤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우리가 우리를 착취하게 하여 우리를 자유에서 멀어지게 하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의미'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내일을 희망하게 하고 오늘에 살아가게 해주는 '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모든 순간이 빛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고, 그렇지 않은 순간과 시간도 나의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아니 그런 시간과 순간이 나의 삶에 더 많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하여 내가 나를 닦달하지 않고, 초록이 변해 붉어지고 이윽고 빈가지로 남는 것처럼 빛나는 모든 순간들이 그대로 빛날 수 있다면, 우리는 강제되어지는 스스로에게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고, 그 자유는 우리가 우리를 착취하지 않는 삶을 간신히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ps.
너도 나도 '손' 안에 사진 및 영상 발신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여러 이데올로기들은 우리를 부품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상 어느때 보다 자유롭다. 적어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 적어도 그렇게 여기라고 강요받고 있다.
실상과 상상의 간극은 안드로메다만큼일까? 그래서 우리는 너무 '나'만이고 싶은 걸까?
우리의 삶의 시작은 우연의 결과이다. 그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죽음'에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한다. 삶의 '의미'를 나의 '의미'를.
그것은 강력한 아킬레스건이다. 가장 강한지만 그래서 가장 치명적인.
그곳에 사회적 착취가 침투한다. 그렇게 우리는 '나'에게 갇히고 강박적 '독창성'에 갇힌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아니 진실이라면 우리는 이제 어떤 나를, 어떤 삶을 지향할 수 있는가?
위의 글이 다시 씌어져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