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끼어드는 전쟁의 조각들
#우리의작은깨달음 #일상다반사 #1
1
쇼파는 편안하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거기에 앉아, 진주와 중산리코스 천왕봉을 손안에서 찾는다. 티브이는 언제나처럼 혼자 떠들고 있다.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시작된 새벽 아르바이트를 가을의 초입에서 마무리 짓기로 하고, 나는 또 한번 이치를 가늠해보고 싶어 지리산을 가기로 한다. 코스는 하루에 천왕봉을 닿고 돌아올 수 있는 중산리코스. 4년 전에 지리산한달살기를 할 때 알아둔 코스이다. 시월의 마지막날에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진주시외터미널로 가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일정이다. 버스표와 게스트하우스 예매를 마치고, 11월 첫날의 지리산을 상상한다. 어지러울 정도로 가슴이 부푼다. 쇼파는 여전히 편안하고, 티브이에서는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민간인 사상자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2
잠실은 평일과 휴일이 없다. 시간대도 없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그에 반해 서울남부터미널은 한산하다. 단층이었나. 2층이었을까. 서울남부터미널은 그곳의 우뚝 솟은 다른 빌딩들과 다르게 낮다. 어떤 처분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터미널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 어르신들이 당신의 차 시간을 기다리시면서 삼삼오오, 군인들이 조금, 그리고 젊은 사람들 몇, 아저씨 몇 분이 전부다. 다찌식의 터미널 분식집에 앉아 늦은 점심에 주린 배를 라면국물에 김밥을 담궈서 달래고 있는데,
"239명 가자지구 억류…인질 귀환 최우선"
옆좌석에서 떡볶이를 먹던 사람의 왼손 위의 화면이, 흘깃 보인다. 라면과 김밥을 마시듯 해치우고서 서초동을 한바퀴 돌고 버스에 오른다.
3
몇이나 동행이 있을까 했는데, 10명이 조금 넘을까. 버스 정원의 반 정도가 푹신한 객석에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사람들이 대부분. 나와 같이 여행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몇몇. 그렇게 남부터미널발 진주착 시외버스는 서초동을 조용히 벗어난다. 멀어지는 빌딩들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눈이 감키고 다시 눈을 뜨니 사위가 어둑해졌다. 대전을 지났을까. 어딘지 모르는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 버스는 신탄진이었나, 휴게소에서 숨을 돌린다.
"불과 3주 만에...어린이 최소 3,257명 사망"
화장실을 들리고 버스로 돌아오는데 휴게소의 어느상점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멘트.
4
저녁 7시가 다 되어서 진주시외터미널에 내린다. 터미널 앞으로 남강이 보이고 남강 위로 예쁜 불빛들이 아른거린다. 남강을 따라서 촉석루로 가는 길은 이번 여행의 또다른 백미. 만추의 가을밤이 온전히 남강에서 고요한 춤을 춘다. 20년쯤 전에 입영을 앞두고도 가을시절의 촉석루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무엇을 봤던 걸까. 왜 이만큼의 풍경으로 기억에 남아있지 않는 걸까. 촉석루 개장시간을 지나 도착하여 그위에 오르지 못함을, 나의 P적 성향을 오래만에 탓하면서도, 그풍경은 그대로 황홀하다. 그 황홀을 가슴에 품고 촉석루와 한참 놀다가, 그만 남강 건너 게스트하우스로 발을 옮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는 거 같에..."
"이제 시작이지, 시가전이 시작되면..."
길을 여쭈려 다가선, 남강 산책할아버지들의 말소리.
5
역시나 게스트하우스 6인실 도미토리가 전용이 된다. 성수기도 아니고 평일 저녁에 게스트하우스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배낭을 내리고 침구와 욕실을 간단히 확인한 다음, 저녁을 해결하러 나선다. 진주는 냉면을 먹어야 한다고 진주에 근무하는 친구는 말 했지만, 혼자 여행할 때 나의 저녁 메뉴 1번은 돼지갈비다. 숙소에서 멀지 않는 곳으로 범위를 제한하고 그중에 20년 정도의 업력을 보유한 곳을 선택한다. '가든'이나 '숯불'이 들어가는 상호면 더할 나위 없고 돼지갈비가 메뉴에 올라와 있는 곳이라면 선택에 크게 상관이 없다. '남강가든' 돼지갈비와 여러 식사류를 내어주는 식당이다. 친절하고 음식의 맛도 괜찮다. 돼지갈비는 평범하나 밑반찬들이 아주 좋다. 왜 몇 몇의 상에서 아저씨들이 백반에 소주를 비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쏘맥을 말아 앞에 보이는 남강으로 운취를 잡고 있을 때,
"말문 닫아버린 가자 세 살배기…"매일매일 더 나빠져"
식당 유리창에 비친 티브이 화면에서 붕대를 칭칭 감은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6
맥주 몇 캔과 포카칩을 사들고 게스트하우스 공유주방에서 간단하게 2차를 자리한다. 주인과 그의 친구가 쇼파에서 한 이불을 덮고 티브이를 보고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느껴진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는다. 주인장은 조각을 전공하였다고.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이 어마무시한 미학적 제목을 달고 그곳에 쌓여 있다. 이런 저런 책을 뒤지다가 '흰 책'이라는 시집을 술상으로 가져온다. 시집의 첫 시의 제목은 '사랑'. 역시나 하며 단상을 쓰고 올린다. 기여이 버리고 싶지만 끝끝내 다시 품어지는 '지남'에 대한 이야기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마저 몇 캔을 비워버리고 자리를 정리한다. 첫 시의 제목이 '사랑'인 시집, '흰 책'도 다시 서재에 꽂는다. 공유주방에서 도미토리로 올라가는데, 주인과 그의 친구가 틀어 놓은 티브이에서 '어린이 묘지'라는 섬뜩한 단어가 나온다.
"양측 사망자 1만명 넘어…"가자지구는 어린이 묘지"
7
지난 일상에서 새로운 일상으로 전환을 위해 나선 여행인데, 계속 귓전에 전쟁이야기 맴돈다.
"일상은 여전히 온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