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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hi Nov 25. 2023

일상은 여전히 온전할 수 있을까_2

살아가야'만' 생존'도' 할 수 있다.

#우리의작은깨달음 #일상다반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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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중산리까지의 첫 차를 놓친다. 도미토리의 베드가 이리도 편안한지 생각한다. 두 번째 차는 아침 8시에서 10분이 빠져 있다. 그차도 놓칠 뻔 한다. 쉬지 않고 걸어서 15분 거리를 뛰어서 온다. 터미널 안에 있는 식당에서 어제 점심과 같은 메뉴로 아침을 한다.


"이스라엘, 백병전 돌입…‘죽음의 시가전’ 시작됐다"


어제와 같은 내용의 뉴스가 식당 주인 아주머니의 풀리고 있는 단발의 파마머리, 그 위에 작고 바래진 선반에 올려진, 손 때가 묻은 티브이에서 나온다. 이쯤이면 이제 어쩔 수 없다. 전쟁은 이번 여행의 초청받지 않은 나의 길동무이다. 그와의 대화를 위해 지리산의 기행을 빨리 적어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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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리는 경상남도 산청군에 있다. 진주에서 그곳까지는 1시간에서 1시간 10분이 걸린다고 매표원께서 알려주신다. 원지, 단성, 산청의 작은 터미널들을 들려서인지 이른 아침에도 좌석은 꽤 차있다. 급하게 먹은 라면과 김밥이 부대껴 중간쯤 아무 좌석에 급하게 앉는다. 동시에 버스는 출발하고 얼마나 달렸을까 차창 밖으로 지리산이 보인다. 또 얼마나 달렸을까 잠시 눈을 감고 뜨니 중산리다. 버스정류장에서 법계교까지, 20분 정도 걸었을까. 어이쿠! 생각보다 힘이든다. 천천히 천왕에 오르며 전쟁과 일상에 대한 생각하려고 했는데, 정상석을 볼 수나 있을까 덜컥 겁이난다. 겁낼 시간이 없다. 너무도 포근한 도미토리의 베드 덕에 최초의 계획보다 1시간이 더 지체 되었다. 등산화 끈을 이중으로 조이고 배낭을 최대한 몸과 하나로 만든다. 발목부터 무릎 뒤허벅지 앞허벅지 고관절 허리 앞어깨 뒤어깨 마지막으로 경추까지 몸을 두 번씩 이완/수축시킨다. 드디어 등천문을 지나고, 작은 흔들다리까지 쉬지 않고 간다. 칼바위로 오르기 전 쉼터에서 몇 분을 뵌다. 인천에서 오셨다는, 우리 부모님 연배의 부부 선생님들에게 눈길이 간다. 그들을 법계사에 한 번 더 뵙고 끝내 천왕봉에서도 뵌다. 이번 여행이 최고의 장면은 서로를 의지하며 끝내 천왕봉에 닿은 그들의 뒷 모습이다. 그들을 뒤로하고 천왕을 내려온다. 산행이 늘어져 중산리발 전주착 막차를 놓칠까 돌길을 거의 뛰다싶이 내려온다. 언제 다시 볼 지리산의 가을 풍경일까. 하산에서부터 아쉬움이 인다.


한 4년만인가 오랜만에 이치를 알 수 있다는 산엘 올랐는데 역시나 나는 많은 흥미들에 빠졌는데 끝끝내 나에게 남는 것은 촉석루의 만추적 무한한 예쁨과 그리고 저 두 분이다 진주는 늦가을에 가야한다 고요한 남강에 비치는 가을이 절경이다 지리산 중산리 코스는 당일 천왕봉을 닿을 수 있게 해주는 대신 다리를 앗아간다 그 험한 아름다움을 곧 일흔을 보신다는 두 분이 끌어주고 밀어주며 끝끝내 하늘에 닿는다 초입부터 자신의 40년 여인을 묵묵히 챙기며 이끌어오는 그, 그와 함께 절대 포기하지 않고 천왕에 올라 앉아 사과를 깍아 자신의 남자에게 건네는 그녀, 그들, 그들을 위한 형용을 아직 나는 떠올릴 수 없다 다만 강력하게 찾아 나설 것이라는 말을 적어 놓겠다 역시나 기분이 좋다


아쉬움은 인스타그램의 한단락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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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가 넘어서 서울남부터미널에 도착한다. 단 하루의 여행이었는데, 뭐가 그리 낯선지 한참 서울을 두리번거리다가 지하철로 내려간다. 잠실역은 여전히 붐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40년 가까이 살아온 동네에서 내릴 때, 그곳도 낯설다.


여행은 그런 것이다. 돌아온 곳을 낯설게 해주는 것. 그리하여 내 속에 새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  여행은 그렇게 다른 시작을 정초하면서 끝이난다.


 그리고 이제는 여행내내 귓전에 맴돌았던 그 단어를 생각해야 한다. 전쟁에 대해서. 극단적이고 광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잔혹 속에서, 우리가 계속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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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개인으로서 전쟁과 같은 구조적 폭력을 막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일 일 때 우리는 무기력을 느낀다. 촉석루의 나의 즐거움과 가자지구의 참혹함은, 그 대비는 무엇을 뜻하는가. 가자지구의 사람들에게 전쟁 전의 일상은 어떤 의미일까. 하루아침에 그들의 일상은 폭력으로 사라졌고, 일상이 사라진 자리에 폭력은 일상으로 자리잡는다.


요는 이것이다. 나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적 강제들과 나의 관계, 그 속에서의 우리의 태도. 그 강제들은 전쟁일 수도 있고 기후전멸일 수도 있고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운명적이다, 어쩔 수 없다, 하면서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그리하여 무기력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걸까. 너무 극단적인 것일까. 하지만 주체(나)와 (외부)환경 또는 사회적 구조의 갈등은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자유의지와 함께 등장하는 단어는 아마도 '불확실(성)'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일상의 지속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두 가지 태도를 야기한다. 어쩔 수 없는 것들, 알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좋으면 초연 또는 조금 나쁘게는 자포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어차피 내 의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거나 적다, 그러니 그것에 많은 것을 걸지 않겠다, 하는 태도인 것이다. 좋게는 구조에 맞서지 않고 유연하게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나쁘게는 어차피 세상은 그런거야 그러니 그냥 살자, 하는 태도들.


그런 태도들과 바탕은 비슷하지만 전연 다른 태도도 있다. '내가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채식을 하는 것과 기후전멸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하는 누군가의 글처럼, 나의 의지를 바뀌지 않을 세상과는 별개로 놓고, 스스로의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텐데 되는대로 살자가 아니라, 오늘 아침처럼 내일 아침이 올 것이라는 무의식적 당연함을 의심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삶의 마지막에 있다는 자각으로 스스로가 설정한 삶의 태도를 고수하는 것. 실상 그렇다. 스스로의 의지와 태도로 살아가는 것과 언제 전쟁의 포탄이 우리의 일상을 파괴할지 모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불확실한 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의지와는 먼 곳에서 이루어지고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글의 마지막을 유연한 태도와 굳건한 의지의 조화 및 균형이라는 단어들로 마무리하겠다, 처음에는 생각했는데, 역시 미지근한 단어들은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런 말이 있다. 살아남아야(survive) 살아갈(live) 수도 있는 것라고. 생존해야 삶도 있다라는 말인데, 왠지 지금은 그 반대가 더 논리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살아가야'만' 생존'도' 할 수 있다. 의지와 태도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진정 살아있음이라고 느낄 때에만, 우리는 겨우 먹고 마시는 생존을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때도 있기 때문이다.



Ps.구조 앞에서 우리 개인의 무력함/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하는가/언제 화마가 덮칠지 모르는 이세상에서 하루를 성실히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순간을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한다/세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과 내가 지금 여기서 성실하고 최대한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전쟁같은 것에 발목잡히지 말자/다만 언제나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한다/원래부터 그렇지 않은가. 전쟁이 없어도 우리의 내일은 어떤 신도 보장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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