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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hi Dec 09. 2023

일차적으로 내가 웃음 짓고 싶다.

나의 수필에 대해서.

#우리의작은깨달음 #일상다반사 #3

늦은 기상에 뻐근한 몸을 일으켜 커튼을 올렸는데 이게 겨울인가 싶다. 겨울치고는 너무 촉촉한 것은 아닌가. 실상 어젯밤부터 온도가 포근하였다. 구름이 많다기보다는 흐린 날 뒤로 겨울이 숨어버린 듯한 날이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려다가 그만두고 그대로 라디오를 켠다. 10년이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 디제이는 여전히 목소리가 좋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다. 간밤에 친구 한 명은 사직서를 던지고 몇이 모여 거나하게 자리를 한 모양이다. 그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쌓이고 쌓인 것들이 가슴을 누르고 눌러 당분간은 뇌를 전혀 쓰지 않고 쉬고 싶다는 녀석의 입장이 퍽 슬프다. 어제 좀 무리를 하더라도 그 녀석들을 만나러 나갈 걸 그랬나 보다.

수필에 관한 책을 집어 들고 다시 눕는다. 저자가 뽑은 한국의 수필가들의 글을 몇 편 싣고 그 수필가에 대한 작가론을 뒷 붙이는 형식의 책이다. 언젠가 그때도 수필, 그러니까 긴 글을 쓰고 싶어서 중고로 찾아 사놓은 책인데 요즘 다시 긴 글을 쓰고 싶지만 잘 쓰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위안을 준다.


독자를 포근하게 하는 요소에는 분명 그의 문체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묘사의 문체가 아닌 구술의 문체. 묘사란 평면적인 문장을 시각화시켜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지가 입체화되기까지 수고로운 두뇌작용을 해야 한다. 구술의 문장은 옛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들려주던 ‘옛날 옛날에 호랑이가 살았더래요’의 민담류의 톤에서 경험했듯이, 청자를 편안하게 하고 아늑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매원의 수필에서 작가는 구술자로 직접 나서 독자에게 얘기하듯 말을 한다. 작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얘기하듯, 그것이 독자를 편안하게 한다._김종완_다시 읽는 우리 수필_’ 자기애의 신화_박연구’_p132_을유문화사


지난 여행에 대한 수필을 쓸 때, 나는 영화를 찍듯이 각 공간과 장면을 묘사하고 그 씬에 반전을 주는 내레이션을 넣는 방식을 취했다. 일상 곳곳에 특히 여행이라는 일상의 이벤트에도 비록 먼 나라의 전쟁이지만 그 상흔이 우리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글로 표현한 방식이었다. 나름 전달하려는 내용과 그것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수필을 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의 글에서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구술의 문학이 독자들에게 편안함을 준다는 것과 나도 어느새인가 이야기를, 전하려는 말을 시각화하려고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 시는 ‘그림으로 노래를 하고 이야기를 전하는…’이라고 적었는데, 내가 글로 너무 그림만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나의 뇌에서도 입체화에 대한 수고가 많아지고 그것이 수필처럼 분량이 많은 글에서 고됨으로 느껴져 글쓰기를 매번 포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수필이란 글을, 긴 글을 자세를 잡고 써보자고 한지 이제 몇 개월이니 몸에 습관이 베어 지지 않는 탓도 있을 것이다.


최초, 짜임새 있는 긴 글을 써보자라고 했을 때, 내 앞에 놓여있던 책은 신형철, 김영민, 권석천의 에세이들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자신의 글로 사람들에게 생각거리와 그것에 대한 ‘일리’를 전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강하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써내기엔 내가 너무 게으르다는 것을 깨닫는 반년이었다. 거기에 글의 형식까지 시각화의 방식을 알게 모르게 채택하였으니 그간 수필을 쓰고자 마음을 먹을 때 무의식적으로 몸이 쳐지고 왜 가슴이 답답해졌음을 알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수필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생활의 발견’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가 다시 ‘생활의 발견’에 대해서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사랑의 발견’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름대로 수필에 대한 등식 하나를 만들어보았다. - ‘생활의 발견’ = ‘사랑의 발견’ = ‘정의 미학’, 수필을 일러 ‘정의 미학’이라고도 보면, 이 등식을 역으로 해서 말해도 무방할 듯싶다. - ‘정의 미학’ = ‘사랑의 발견’ = ‘생활의 발견’._박연구_어느 봄날의 일기_같은 책_p137에서 재인용


글을 쓰는 목적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구원에 있다. 진솔한 자기 고백 속에 자기 위안이 있는 것이고, 이차적으로 독자를 구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문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한다._박연구_환경운동과 수필 쓰기_같은 책_p141에서 재인용


내가 수필에서 펼치고 싶은 것은 쉽게 넘어가고 넘겨지는 일상의 것들을 시간을 들여 다른 시선으로 보고 깊이 생각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익숙하여 당연한 것들이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그저 시류를 따라 살아가게 하는 삶에서, 좀 더 나에게 가닿는 삶, 내 삶의 한복판에 서보게하는 일을 바란다. 지금 이문장은 나에게도 아직 낯설고 매끄럽지 않다. 그만큼 나에게 수필이란 이것이다, 말할 수 있을 만 큰 온전히 정리가 되지 않음이다. 다만, 오늘 깨닫는 것은 내가 수필로써 나를 구원하고 사람들에 작은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글의 소재들은 거창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일상에서 나를 찾고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글쓰기는 위의 인용문을 쓴 수필가 정도는 돼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나의 수필이 어디에 가닿을 수 있을까. 벌써 아득하다. 다만 성실하게 쓰고 싶다. 그리하여 어느 날 모아져 있는 내 수필들을 보고 일차적으로 내가 웃음 짓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은 써야 한다.


ps. 그저 일상의 메모로 남기려고 쓴 글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나의 수필에 대한 출사표가 돼버린 기분이다. 이것이 글쓰기의 매력이다. 첫 글자를 쓰거나 타이핑할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온다.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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