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행위'가 주는 어떤 안정감
#우리의작은깨달음 #일상다반사 #4
마지막 달에 있다. 크리스마스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고, 음력으로도 동지섣달 중 동짓달에 들어섰다. 보통 음력을 더 좋아하는데 그것은 달의 모습과 내용 때문이다. 채워지고 비워지는 달은 해와 다르다. 또한 밤중에 있으므로 어둠을 배경으로 한다. 채워지고 비워지는 어떤 리츄얼적인 형식에다가 어둠은 없음을 연상하게 하고, 그 없음의 한가운데 빛을 내는 달의 모습, 거기에 달은 태양을 받아들여야만 빛을 낼 수 있다는 존재적 한계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달을 더 좋아하게 하는 만든다.
날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신월이 나흘 전이었는데 그 맵시 있는 초승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을 때, 세상의 색들이 지워지는 겨울날 저녁 하늘에, 날카롭게 걸리는 동짓달의 초승 말이다. 가장 ‘더운’ 겨울, 이라고 뉴스는 날씨를 전한다. 따뜻한, 이라는 단어도 아닌 더운이라는 단어가 무겁다. 그 더운 겨울에 연일 하늘이 흐리고 비도 며칠째 온다. 오늘 아침에야 겨울에 온 봄비가 잔설로 변했던데, 우리 집 마당에 서 있는 대추나무의 얇은 빈가지에 가냘프게 놓인 흰 것들을 보니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이제는 또 며칠 동안 영하 10도의 추위라는데, 극과 극의 날씨가 더 심해질 기후위기의 시대,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는가.
공감하고 생각하기
텍스트를 읽을 때 먼저 필요한 것은 공감하는 일입니다. 톨스토이가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의 삶을 미메시스(mimesis,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로서 모방이나 재현)했듯이, 우리도 공감하면서 텍스트를 마음으로 미메시스합니다. 스캔하면서 공감해요. 그런데 그 공감의 선에서 이상이 생겨요. 제대로 스캔되지 않고 덜컹거리는 대목들이 있어요. 그곳이 텍스트의 증상이에요. 바로 그 대목에서 우리 생각이 시작됩니다. 물론 생각하기 전에 찾아볼 것은 찾아봐야 합니다. 먼저 찾아보고 다음에 생각하기. 그리고 그 증상 속으로 들어가면 텍스트의 무의식에, 심층에 도달하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_서영채_왜 읽는가_p155-156
오래전에 어딘가에 적어놓은 글이 있다. 공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받아서, 나는 글을 읽는다,라는 말. 내가 글을 읽는 이유는 유년시절 학창 시절 캠퍼스시절, 사회적 제도 때문에 우연하게 만났지만 어쨌든 그 시절들에서는 매일을 붙어 있다시피 한 친구들도 공감하지 않던, ‘뭔 이상한 소리야’ 하던 내 생각과 생각들, 감정과 감정들을 책의 어느 한 구절, 한 단락에서 공감받았기 때문이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했을 때,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뜨여질 때,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의 첫 단락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위대한 약속은 지키켜지지 않았다고 써놓은 문장은,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라고 훈계받던 친구들과 술자리의 분함을 달래주었고, 타인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어느 시인의 절창은 그럼에도 친구들을 떠나지 못하는 나의 처지를 위로해 주었다.
왜 읽는가? 공감받기 위해서 읽는다. 이 문장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으로 인정이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타당하다. 그렇다면 공감하기 위해서 읽는다,라는 문장은 어떠한가. ‘하다’와 ‘받다’. 이 둘의 차이는 크다. ‘하다’는 적극적으로 공감을 해보겠다, 하는 의지의 영역이고, ‘받다’는 공감되는 것만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생각과 감각에서 공감이 되는 텍스트들에만 한정하여 읽는 것. 이것이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텍스트의 증상’, 그러니까 인용문이 내 마음에 ‘제대로 스캔되지 않고 덜컹거리는 대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굳이 공감이 가지 않는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것인가? 그럴 필요는 무엇이란 말인가. 인용문의 저자 그 이유를, 그 필요를 ‘생각의 시작’이라고 썼다. 어떤 공감을 받기 위해서 텍스트를 읽는다. 읽다 보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저자의 글을 통해 ‘재’ 확인하면서 어떤 기쁨과 위안 그러니까 일종의 안정을 얻는다. 그러다가 나와는 다른 생각을 만나고 내게는 낯선 감각과 감정을 느낀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불안하다. 이게 뭐지, 내가 뭘 모르고 있는 걸까, 내 생각이 어떤 틀에 갇혀 있나, 하면서.
아! 이렇게 생각이 시작되는 것인가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공감되지 않는 글을 읽지 않는다. 어떤 관심이 일어서 책을 사려고 서문을 읽어도 그곳에 불편한 문장을 만나면 책을 덮어버린다. 그래서 읽은 책 중에서 나쁜 책이 없다. 이미 스스로에 한해서 나쁠 수 없는 책과 텍스트를 선별한 이후 읽기가 시작되므로. 나쁜 것이 없으니 비판도 없다. 언제나 경전을 대하듯이 책을 대하고 내용을 새기기만 할 뿐. 이런 습관을 어렴풋이 알고도 있었다. 그런데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새로운 읽기가 두려워서인지 정리를 해내지 못했다.
당신은 왜 읽는가. 여기 두 가지의 답이 있다. 답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실은 읽기의 방법에 더 가까운 내용이다. 그것의 하나는 ‘공감받기’ 위해 읽는 것. 이 첫 번째 방법은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위안을 준다. 이것만으로도 글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다른 하나인 ‘공감하기’ 위해 읽기. 이것에 대해서는 아직 앞서 말한 내용 정도로 어렴풋하다. 다른 생각의 시작, 다른 감각의 발견. 그리하여 다른 나와의 만남, 그 만남이 가져다주는 다른 시각. 그 시각으로 말미암을 어떤 시작들, 그 시작이 데려갈 삶의 순간과 순간들. 어쩌면 정말 우리가 맞이해야 할 삶의 그것들 말이다.
Ps. 또 한 번 솔직해지면 고르고 골라서 공감을 받는다, 하며 산 책들도 며칠이 지나고 다시 손에 잡으면 전혀 다르게 읽힐 때도 많다. 그래서 방구석 어딘가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책이 몇 권 이던가. 아득하다. 어쩌면 책에서 공감을 받고, 하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변덕은 초단위니까. 그렇다면 내용과는 관계없이 그저 ‘읽는다는 행위’가 주는 어떤 안정감이 우리를 읽게 하는 것을 아닐까. 일종의 명상, 요가처럼, 채워지고 비워지는 달을 바라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