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야 아무렴 어때. 어디에선가 읽은 말이 있다. ‘누군가의 이름은 그 누군가에 대해 어떤 것도 알려주지 못한다’는 말. 사실이 그렇다. 이름은 단지 주어진 것이 아닌가. 물론 심심한 마음으로 지어주셨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름이 단지 주어진 것처럼, 우리의 탄생도 랜덤이다. 우리가 우리를 낳아준 사람들에게 나를 지금의 나라는 사람으로 낳아달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름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처음은 아니지만-엄마 아빠 그리고 맘마(밥)라는 생존의 옹알거림이 먼저이기에-삶에서 우선적으로 인식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름은 기표와 기의, 전달과 약속 등등의 말이 따라붙는다. 저 단어들의 공통 속성은 소통이다. 그리고 소통은 둘 이상의 관계가 전제된다. 고요하게 앉아 명상을 하더라도 나는 또 다른 나와 둘이 되어서 침묵의 말을 주고 받는 것처럼.
그저 주어져서 받아쓰고 있는 이름이 너와 나의 관계를 개시한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가 너의 이름 부르면서.
우리의 얼굴을 보며 우리의 이름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불러주고 또 가장 많이 불러주는 사람들은 가족일 것이다. 그렇게 가족들에게 이름이 불리다 보면, 스스로 역시 스스로를 이름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인식은 우리를 어떤이들의 자식, 누군가의 손자, 나와 닮은 누군가의 형으로 확장시킨다. 어쩌면 자의식이란 것은 타인들의 호명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날 수로 가족 말고도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는 범주가 늘어난다. 친척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동료들도 있고 등등. 그런면서 드러나는 역설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이름을 불러주는 관계들이 늘어갈 수록 이름은 흐릿해 진다는 것. 가족이 바라보는 나와 내가 바라보는 나, 친구들이 바라보는 곳과 내가 가고자하는 곳, 조직의 방식과 내 방식. 나보다 관계를 우선하는 많은 순간들.
그것은 관계에 대한 함몰, 나의 사라짐이었을까.
나의 사라짐을 의식하고 나를 다시 나타내려고 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나를 관계보다 우선해야겠다고 다짐하고 행동할 때는 언제였을까. 울면서 나를 낳아준 사람들 앞에서 핏대를 세우던 비오던 11월의 새벽이었을까. 친구들 모두가 가는 길에서 벗어나 홀로 다른 길을 찾아가던 그때였을까. 나만의 나를 만든다면, 나의 사라짐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던 때와 그때의 모습들.
친구들의 말에는 일단 단지를 걸었던 철 없는 시크. 그 아이를 위한다는 것인 어떤 마음인지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노래 가사처럼만 만난 그아이. 부모가 어깨에 짊어진 것이 무엇인지, 무게는 어떠한지 입으로만 그것을 알고 머리로만 이해하던 그들의 삶. 최악은 어설픈 문사철로 삶은, 인생은 이러하고 저렇다며 떠들어대는 어설픔과 부박함.
향유로써가 아닌 부유로써의 ‘방랑’의 모습들.
앞의 모습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과거의 모습이라는 말투로 말을 했지만, 그것들이 지금에서 그렇지 않다고 적는 것은 거짓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변할 수 있을까? 변한다면 어떻게 변할 것인가. 북극성을 만들고 그것을 따라 간다. 과정으로의 삶. 서술하는 과정, 정해진 이미지를 손아귀에 넣는 것 보다. 정해지지 않은 목적지들, 부유하지 않고 흐르다. 재생멈춤버튼이 없는 동영상 속에서,
너를 만나는 것.
변한 것은 없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고만 하는 것도 자위다. 관계와의 갈등을 무시만 하고 타협에게는 꽁지돈만 빌려 살아온 시간. 그렇게 지금까지 내 이름으로 얽히고, 내 이름으로 설킨 것들.
바뀌지 않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그때의 시간.
이제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 폼 잡을 필요없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만을 찾을 필요도 없다. 꿈만을 찾을 필요도, 찾은 꿈만을 위할 필요도 없다.
‘이름을 불러주어 마침내 너’라는 시의 구절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 이 질문은 지금까지의 맥락과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이름과 관계 그리고 정체성과 삶의 태도까지 훑으면서 든 지금의 생각은, 내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를 찾기에 앞서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진정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먼저라는 것, 그것이 내 이름을 찾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제는 마침내 누군가의 이름을 진정으로 부를 수 있어야만, 역설적으로 내 이름이 내 이름이 된다는 것일까.
만약 그리고 진정으로 그렇다면 이제 나는 내 이름을 위해, 가족을 연인을 친구를 그리고 또 누군가의 이름들을 소중히 불러야한다. 지금까지 홀로 고고함을 좇던 내 이름은 그 관계를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조금만 더 다정하게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내 안의 단단한 중심에 곁을 내주어보자. 그렇다고 좋은 순간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렴. 나만의 이름은 나 혼자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창에서 오붓하게 내 이름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