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작은깨달음 #일상다반사 #9 #부디
0. 연상과 연하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인 우리. 추위에 약한 몸이어서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모든 것이 사리진 것은 아닌 달, 11월부터 집 근처 북한강 옆에 크게 위치한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여유 있게 커피를 내리고 시간이 나면 시를 조금 지어볼까 생각했었는데 군대 때와 비슷한 강도의 바닥 청소와 20가지가 넘는 음료 제조 조리법을 외우고 또 외우고 있다. 오늘은 마감조에서 한 시간이 빠르게 일정이 잡혀 그곳에 갔다. 여전히 어리바리하게 주문을 받고 조카뻘인 친구들의 환상적인 음료 제조 손놀림에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보인다. 58년 개띠인 내 아버지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연배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하얀 여인이 세 발로 화장실을 향한다. 그는 그의 여인의 한쪽을 아기 다루듯 부축하여 여성 전용 화장실 앞까지 에스코트하고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이내 그의 여인이 세 발로 나오고 그는 그녀를 아까와 마찬가지로 빈자리로 모시고 자신들의 원 자리에서 코트며 장갑이며 목도리 그리고 모자를 챙겨 와 그의 그녀에게 입히고 끼우고 두르고 씌운다.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의 또 다른 지팡이가 되어 문을 나선다. 그 뒷모습에 울컥하여 주문도 잊고 한참을 본다. 사랑이 뭘까. 어미와 자식은 무엇인가. 죽어가는 세 발의 어미에 대한 늙은 자식의 사랑은 무엇인가. 그런 아들에게 기대어 주말 데이트를 즐기고 돌아가는 연상의 여인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마지막 날로 다가가는가. 우리는 그들의 뒷모습을 어떻게 간직해야 하는가.
1. 해가 조금씩 길어진다
그제였던가. 정오를 한 시간 못되게 남겨두고 기침하여 익숙한 우리 집 앞의 산의 속살에 눈이 녹지 않은 풍경에 끽연의 연기를 내뱉는 와중 그 속으로 벌이 날아들어 왔다. 봄이 온 것인가. 하긴 나 또한 외투를 걸치지 않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계절이 돌아섰다. 저녁에 해가 길어짐을 보고 느낀다. 다음 주의 영하 10도 이하의 예보가 춥지 않다. 계절은 그런 것이다. 지금은 겨울, 지금 봄, 지금 여름, 지금은 가을. 이런 인식이 우리에게 너무 당연할 때 떠남을 준비한다. 그러고 보면 김장을 끝낸 지 두 달, 예수의 탄생이 지난 지 한 달이 지나간다. 달의 새로운 날, 설날은 이제 한 달 안으로 들어왔고 그리고 나면 세뱃돈으로 새 가방과 새 신발을 메고 신은 학생들은 새로운 학기를 시작할 것이다. 경제라는 이상한 문맥의 1분기가 벌써 반이 돌아섰다는 이야기, 시간은 어찌하여 이렇게 가는 것인가. 시간은 쏘아진 살, 살은 만들어진 과녁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과녁을 찾아가야 하는 가엾은 맥락들.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시절의 우리는 어떤 과녁을 만들어 갈 텐가. 당신을 응원한다.
2. 다시 부른 노래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일은 쉽지 않은 일. 그것이 없음에도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가수들, 뭉클한 일. 싱어게인이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이유는 참가자들의 서사다. 무지막지한 우주급 실력이 있지만 인정이라는 것에서 멀었던 가수들이 이건 무대가 아니라 거의 진기명기 수준의 노래를 선보이는 시간 속에서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일련의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큰 위로를 받게 한다. 음악과 노래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예술은 무엇인가. 내가 아는 예술가들은 그들의 당 시대에는 어떤 인정도 없던 사람들이 전부인데, 내 식견이 짧을 수 있지만 그들이 진심을 다했던 자신들의 삶을 동경하고 그것을 내 삶에 투영하는 것, 그렇게 마음의 위로를 받아 따뜻해. 그리하여 다시 기대를 삶의 실제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지와 태도, 멋이 있는 일.
3. 잊지 못하는 서정을 놓아버리는 일
이천 십 칠 년도였을까. 너무도 예쁜 너의 사진을 페이스북에서 보고 첫눈에 반했던 일. 그리고 우연에 의지해 너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던 나날들. 그 시간이 벌써 아득해지는 어제와 오늘. 나의 모든 사랑의 글은 너에게 쓰는 편지였음을 너는 이제는 알까, 그리고 혼자서 좁은 내 방의 작은 창에서 보던 선이 곱던 달들의 모습은 전부 너의 얼굴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다시 고백하는데, 무작위로 틀어놓아 울리는 핸드폰의 음악이 이별의 사랑을 아름답게 부르고 있을 때, 너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가. 다신 만나자, 언제 좋은 기회가 다시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너를 놓아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길,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위로한다. ‘이렇게 하면 너를 가질 수 있을 줄 알았어’ 하는 그 느끼한 드라마의 대사를 실현해 버린 어제의 시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남자가 생각보다 연약하다는 또 다른 드라마의 대사를 위안 삼아보는데, 언제까지 드라마를 동경할 텐가. 아마 멋진 대사들은 영원일 것이다.
4. 급하게 마무리를 짓는 일
하루에 한 편의 시를 읽는 마음의 필사와 일주일에 한 편의 수필을 쓰는 일상다반사를 본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나날. 시는 잘 써지지는 않지만 어색함이 없고, 나름의 긴 글은 마구마구 써지는데 편하지 않다. 타이틀로 단 우리의 작은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글인 것인지, 그저 긴 일기일 뿐인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들. 그래도 너와의 약속을 지키려 형식을 어기지 않는다. 이 어기지 않음이 세 발의 여인을 사랑하는 늙은 아들을 사랑을 조금은 가늠하게 한다, 이 어기지 않음이 돌아서는 겨울이 길어지는 햇살을 받아들이는 시절을 보고 느끼게 한다, 이 어기지 않음이 다시 자신을 부른 노래의 주인공들의 노래를 듣게 한다, 그리하여 너를 떠나보내고 다시 너를 기다리고 다시 너를 받아들이게 되는 일, 기다려지는 일, 그리고 기다리는 일
Ps. 포기하지 않는다. 나름의 긴 글을 포기하지 않겠다. 당신과 나의 작은 깨달음이 삶에 깊은 시선을 주는 일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