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보름이 하늘을 밝히고 있다. 신묘한 구름들이 자리를 내주었는데, 내가 있는 곳보다 위도가 조금 낮은 곳에서는 어제 폭포수가 내렸다고 하는 뉴스들, 그곳의 그들도 저 보름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점심에 마신 쏘맥 몇 잔에 오후 내내 잠을 자다가 어둑해진 저녁에 눈을 떴다. 확실히 해의 시간이 짧아졌음을 느낀다. 명백히 저녁 햇살은 피부에서 약해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언제부터고 보름에는 괜실히 몸이 무겁고, 정신이 평소에도 산만한 정신이 더 산만해짐을 느끼고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인력이라는 것이 작용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곳과 알 수 없게 이어져 있는 어떤 보이지는 않는 선이 더욱이 팽팽하게 나와 대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나를 끌어당기는 것.
나는 버티고만 있고.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어디일까. 어제인가 내일인가. 둘 모두? 여하간 나는 왜 버티는걸까? 끌려가면 안된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곳은 죽음과 비슷한 것일까? 여기가 아니면 안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에 너무 매여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모르는 나 내가 아는 나와 당신이 모르는 나 내가 모르는 나와 당신이 아는 나 내가 모르는 나와 당신도 모르는 나
누군가의 글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구분법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저 네 가지 구분법의 나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제일까 내일일까 지금일까.
얼마 전에는 무의식이 스스로 자기를 실현시켜주는 신비의 영역이라는 글에 매료가 되어서 나를 그저 두어보자 했는데, 오늘은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또 그것에 관심이 간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결핍은 욕망이며 욕망은 나를 흐리게 한다, 너의 목소리에서.
균형과 조화를 다시 적어놓았는데, 그것은 단지 봉합적인 것이 아닐테다. 모순과 음양은 명백하게 다른 것들이다.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없다. 어떤 계시가 되기 전까지. 그저 확률일 뿐.
갈마든다는 말은 모든 것이 무상하니 놓아두라는 것일까. 변화, 아침 저녁으로 종이에 써지는 글에서 담정 성의 분투 예의 최선 여유 이것들은 모두 변화로 수렴된다. 변화에 애쓰고 있다는 방증일텐테 난 왜 보름이 펼쳐내는 인력에서 버티고 있는가.
혹, 버틴다는 감각이 편견일까. 새로운 어제로 또 다른 내일이 지금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데, 그것이 처음이라 두려워만 하고 있는가. 두려움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는 것이라는 말. 바라봄 이후에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테니 그렇다면 또 다시
잇츠 타임 투 렛 고.
무엇을 놓을텐가. 어디로 끌려갈텐가 그러면서 어떤 문양으로 수영을 할텐가. 저 한 없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내가 남기는 파동은 과연.
선선한 바람이 저어 곳에서 불어오고 있다. 그 시절에서 나는 또 살아질 것이다. 그리고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