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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Oct 17. 2018

침묵은 가장 큰 목소리

침묵은 외면이 아닌 기다림입니다.

개인적으로 윤동주의 시를 좋아한다. 절제되고 정제된 단어의 선택과 시대를 반영하는 묘한 슬픔이 주는 매력도 있지만,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자기반성이 주는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시마다 길이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하나같이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는다. A4 용지 몇 장이 필요할 것 같은 말을 몇 행의 문장으로 풀어낸다. 그의 시를 해설한 글들의 양이 엄청난 것을 보면, 그의 시는 거의 침묵 그 자체의 수준이다. 그러한 경지에 있기에 그와 그의 작품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이다.


문학적으로는 이렇게 잘 이해하는 것을, 현실 속에서 반영시키기는 굉장히 어려웠던 것 같다.




우리는 각각의 방식으로 말을 많이 한다. 


타인의 생각이 자신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한다. 상대가 내 생각을 알아줬으면 좋겠고, 이해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을 하고, 상대가 들어주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물론 상대방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그 말은 길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말 자체를 많이 안 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 그렇지만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혹은 그녀에게도 희로애락의 양은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귀로 들을 수 있는 말보다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한다. 서서히 연락을 피하거나, 약속을 미루는 등의 행위가 그러한 표현의 일종일 것이다. 불편함이나 불쾌함을 피하고 싶음과 동시에, 본인의 기분을 알아달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표현을 중요시 생각하는 터라, 나 역시도 어떤 식으로든 내 이야기를 전하면서 살아왔다. 나의 방법은 주로 직구 성향을 가득 띠고 있는 말이었다. 최대한 완곡하고 차분하게 표현하고자 할 때는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매체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나의 표현은 항상 직관적이었고, 날카로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제는 점차 돌려서 감정을 표현하는 후자의 방식도 꽤나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식적인 내 모습을 바라보고 뭐지, 싶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누적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피로감을 조금은 어른(?)스럽게 푸는 것 같아서 약간의 기특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나는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믿어왔다. 


그래서인지 내가 집어주지 않으면 상대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아서 항상 불안했다. 그렇지만 솔직함이라는 쿨해 보이는 가치관으로 포장된 날카로운 표현들은 나의 오만함이었다는 게 현재의 결론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 정도 혹은 나 이상으로 지성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굳이 일일이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나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그리 표현하는 데에 집중했을까, 하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표현해야만 상대가 알 수 있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왜 항상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모든 것을 설명해야 직성이 풀렸는지 궁금했다.


이 호기심은 아직도 나를 피곤하게 한다. 명확한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도 많이 사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기억이 난다.


그나마 막연하게 내가 짐작하는 답안은 어느 책에서 찾게 되었다. 예전부터 인상적이어서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는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말이다. 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철학자는 청년에게 그렇게 말한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차분하게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귀찮아서 분노라는 더 값싼 수단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고 한다는 식의 논지였다. 사람과 사람의 감정이 가지고 있는 온도는 항상 다를 수밖에 없는데, 나는 그걸 기다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거나 상대를 기다려주면 되는 것인데, 효율적인 의사소통이라는 명목 하에 이를 외면했다고 볼 수 있다.


입을 닫고, 가만히 기다려주면 되는 것인데.

그 쉬운 게 그렇게 어렵다.




그래서 요즘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을 반추하면서 살고 있다. 2년 전 겨울, 그녀는 강은교 시인의 <사랑법>이라는 시를 소개해주시면서 침묵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신 적이 있다. 그 뒤로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그 시를 읽었다.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써가면서 내 마음속에 문장을 새겨 넣으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침묵의 가치를 믿는 것은 인생의 선배가 해준 조언에서 나아가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을 때보다, 가만히 침잠할 때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내가 어떠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에는,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오히려 상대가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이 인위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점차 깨달아가고는 있다. 머리로는 이렇게 인지하지만, 막상 그러한 상황이 닥치면 침묵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당황스럽다.


'거봐, 누구나 그래.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니깐.'이라고 평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고,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철학자의 말처럼 게으른 존재일 뿐이다. 그저 조금이라도 편하고 쉬운 길을 택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나 역시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범인일 뿐이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흐르는 물과 같은 관계를 꿈꾸기에, 오늘도 침묵하는 법을 되뇌인다.


그래서 오늘도 그 시를 노트에 끼적인다.






도서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웹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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