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츤데레 Sep 14. 2018

너무도 나약한 인간이라는 존재

영화 <명당>을 보고

영화 <명당>은 '역학 트릴로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관상>에서의 성공을 이어가고 싶어 하지만, 꽤나 주춤했던 <궁합>의 실수는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영화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래서인지 <관상>과 비슷하게 영화는 전개된다. 왕권이 우습던 시절, 권신과 왕족의 암투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역학의 천재가 큰 판을 짠다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시대극을 좋아하고, <관상>도 재미있게 봤기에 이 영화 또한 괜찮았다.


그렇지만 영화를 조금 봤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몇몇 비판 거리를 제공할 것만 같다. 주연급 인물의 스포트라이트가 균일하지 않으며, 빠른 전개를 핑계로 너무 쉽게 갈등 구조가 끊어져 버린다. 나름 중요한 인물로 보이던 배우가 갑자기 죽는다던지, 주요 인물의 한 마디로 모든 관계가 정리된다던지 하는 장면들은 보는 사람들의 힘을 빠지게 하기 충분하다. 아무래도 러닝 타임이 2시간 안팎으로 제한되어있고, 역사가 스포일러로써 정해진 결말을 띄고 있기에 이러한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스토리나 전개, 촬영 기법들보다는 영화가 보여주는 인간의 단상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보여주는 특유의 나약함이다.




배경은 조선 후기로 세도 정치가 판을 치던 시절이다. 그래서 영화는 김좌근(백윤식 분)으로 대표되는 장동 김씨(실제로는 안동 김씨일 듯) 일가와 흥선군(지성 분)으로 대표되는 왕족 세력의 갈등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두 세력의 욕구와는 관계없이 종묘사직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는 지관 박재상(조승우 분) 일행이 그 사이에 등장한다.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주인이 되고자 명당을 찾으려는 자들의 피 튀기는 노력을 영화는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모든 이야기는
'기승전-명당'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명당에 대한 논의는 거의 집터나 조상의 묏자리로 한정된다. 그렇지만 영화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풍수지리를 이야기한다. 인생의 화를 누를 수도 있고, 복을 증폭시킬 수도 있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스치는 둘의 인연이 모든 파도를 만들어 낸다.


저잣거리의 배치를 바꾸는 장면에서 이러한 논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단순한 미신이나 학설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의 흐름이 필요하다.'라고 박재상의 입을 통해 말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볼 때는 백화점 카테고리 매니저의 모습 같이 보여서 재밌기도 하지만, 일상 도처에 풍수가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감독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 속의 핵심 개념인 명당에 대해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전개의 연장선 상에서 등장인물들은 조상의 묏자리가 큰 역할을 했고, 앞으로 후손의 명운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한 신념은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죽게도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그들은 그렇게 믿었을지, 또 감독이나 작가들은 명당을 점유하는 것이 곧 패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지는 의문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의 업적만큼이나 무능 또한 엄청나기 때문이다. 단순한 무능은 그저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는 중요한 시점에 수 천만의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의 실책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다만 이 영화는 본격 집권 전의 이야기이기에 그의 인간적인 면만 다루고 있다.


그래서 능력적인 측면과는 별개로, 흥선은 카리스마적인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는 냉정한 협상가로, 본인의 욕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준비한다. 상대의 상황이나 필요까지 고려해가면서 말이다. 몰락했더라도 봉건시대의 왕손인데, '상갓집 개'라고 놀림을 받으며 스스로를 낮추고 참던 모습은 그의 저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현실적인 차선책이나 차악을 골라가면서 삶의 무게를 버티고, 때를 기다리던 사람이다. 흥선군의 처세에 대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가 명당을 확보하지 못했더라도 결국은 세상을 얻었을 그릇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흥선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차선과 차악을 냉정하게 비교하는 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주요 인물들도 그러하다. 실세인 김좌근(백윤식 분)도, 그의 아들 김병기(김성균 분)도 자신의 권력과 부, 그리고 능력으로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인물들도 그렇다. 영화의 제목이 제목인지라 모두가 명당에 목을 매고는 있지만, 그들은 그게 아니면 무언가를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인지 묻고 싶다. 답은 간단하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가 명당에 집착하는 이유는,
인간이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흥선도, 왕도, 장동 김씨 일가도, 그리고 박재상 역시 모두 인간이기에 나약하다. 영화 <더 킹>에서는 검사들이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를 알아보러 무당에게 가서 점을 치며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나온다. 시대를 뛰어넘어 그런 인텔리 권력층이 뭐가 아쉬워서 비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하겠는가. 그들은 그저 듣고 싶어 한다. 자신의 결정이 맞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듣고 합리화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믿고 의지하고 안심하고 싶은 것이다.


더욱이 영화 속 배경은 질풍이 몰아치는 시대였다. 그 속에서 스스로 버틸 자신이 없고, 그래서 인물들은 무언가에 의지하며 본인이 잘될 것이라고 위안받고 싶어 한다. 권력, 부, 패권, 복수 등 넘쳐나는 각자의 욕구를 주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미래가 다가올지 모른다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다. 한 번의 실수가 계획은 물론 스스로의 목숨까지 위협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계획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이었고, 풍수지리라는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논리를 찾은 것이다. '나의 선택은 정당하고, 그로 인한 결과도 찬란할 거야.'라는 식의 믿음 말이다.




지금은 미신으로도 치부되는 풍수지리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등장인물들의 노력을 우리가 비웃을 수는 없다. 시간이 흘러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의 불안정성은 과거에 비해 감소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나약한 존재들이다. 명당에 기대고자 하는 욕구는 없어졌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른 것들에 기대며 살아간다. 종교에 의지하며 신의 응답을 갈구한다던지, 사람에 의지하며 그 혹은 그녀를 믿는다던지 하는 모습은 우리가 그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상이 달라졌지, 본질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나약한 존재이고, 앞으로도 이 명제가 크게 바뀔 일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너무 다른 대상에 의지만 해버리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종교의 경우에는 맹신으로 빠질 수 있고, 타인에 의지를 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무력감에 빠지면서 상대를 갉아먹을 수도 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 무겁다고 의지할 무언가만을 찾아 헤매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상처는 우리를 강하게 한다. 겁을 낼 필요가 없다.


풍수지리라는 논리에 의지했던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몰락했다. 명당이 책임지지 않는 그 이후에 대해 태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는 당당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무언가에 의지하기보다는, 다치더라도 스스로 버티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인생의 물길은 단순한 논리로 해석되지 않을 만큼, 많은 요소들과 작용하며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이다. 아직 찢어지지 않은 상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혹여 상처가 벌어져서 피가 솟아나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상처는 흉터가 되어 굳은살로 아물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흥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를 참석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스틸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찢어지지 않은 상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