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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Aug 29. 2018

찢어지지 않은 상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피천득 <인연>을 읽고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필인 <인연>은 위와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피천득 선생과 아사코라는 여인의 인연에 대해 그린 작품은, 인연이라는 것이 가진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운 마음에 대한 해답이 반드시 만남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는 표현과 어느 정도는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적어도 몇 달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꾸준한 사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판단이 되면 끊임없이 최선을 다한다. (조금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면 별 노력을 안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집념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집착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나는 노력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피천득 선생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엔 신선하면서도 마음 아픈 충격을 받았다. 이해나 공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한 반항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저 글귀를 읽고 또 읽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에 처음 저 글을 보았으니, 10년도 넘는 시간 동안 그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는 되지만 공감은 하지 못하고 있다.



꽤나 긴 시간 고민해봤는데도, 결론을 내기가 어려웠다. 물론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연이란 노력의 영역이 아니다.'라던지, '무조건적인 노력이 답은 아니다.' 정도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 마음을 마냥 표현하기보다는 참기도 하고, 기다려보기도 했다. 물론 잘 하는 분야가 아니라 미흡하긴 했다. 그래도 오랜 기간 동안 피천득 선생의 글을 되새기며 느낀 바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문장이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림이 많은 문장이다. 지금까지 수 십권을 사서 소중한 이들에게 선물했다.


그렇지만 요즘 내가 느끼는 것은 조금 다르다. 나는 이제 저 글을 다르게 이해한다. 선생이 느낀 세 번째 만남에 대한 회한도 결국 그녀를 만난 후에 생긴 결과에 불과하다.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나 '만났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상대방이 혼란스러울 때는 기다려주고, 공간이 필요하면 한 걸음 물러나 주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혹은 상처를 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상대를 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자신과 그 상대에게 또 다른 후회와 상처만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건 배려가 아니라 비겁함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험을 돌이켜봐도 그렇다. 나도 상대도 머릿속으로는 다시 만나게 된다면 더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느 정도 생기다가도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가정법 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또 그걸로 싸운다면..'으로 시작해서 '또다시 헤어진다면..'으로 끝나는 예문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하다. 그러한 상황 혹은 유사한 상황에서 이성적인 선택도 감정적인 선택도 해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결과적으로 나에게 남는 것은 후회였다.


다시 만나는 연인이 같은 이유로 헤어진다거나, 싸우는 빈도가 줄어들어 더 화목해진다거나 하는 일반화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떤 선택이 더 낫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선택이 후회로 점철된 까닭은 그 선택 자체 때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선택과 후회를 핑계로 충분히 최선을 다하지 않은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최선도 다 하지 않고서는, 선택에 대한 결과가 발생하면 '그럼 그렇지..' 하고 숨어버렸던 것 같다. 핑계를 대고, 그 뒤에 숨어버린 비겁한 기억들이다.




엄밀히 생각해보면, 세 번째 만남을 후회하는 선생의 문장도 만남 그 자체보다는 과정을 후회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요즘 부쩍 한다. 항상 아련한 마음은 늘 가지고 있었으나, 선생은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사코는 기다림에 지쳐 결혼을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스한 배려처럼 느껴지는 기다림도 중요하지만, 그걸 진정한 사랑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상대에게 주는 확신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확신을 보여주는 것은 상황에 적절한 행동일 것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모른다.


모두가 현명해지길 바라면서 써보았다. 피천득 선생의 또 다른 유명한 문장이다.


나는 'should have + pp'를 붙여가면서 선택에 대해 실망하며 살기 싫다. 그 상황에서의 최대한의 확신을 가지고 결정을 한 뒤, 이후에는 돌아보고 싶지 않다. 그저 앞으로 펼쳐질 상황들에만 최선을 다하고 싶다. 몇 개의 옵션을 두고 고민만 하는 것은 비겁하다. 운명이라는 것이 아무리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 해도, 그러한 상황에서 손 놓고 있는 것은 무책임하다. 일종의 삶에 대한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다. 위 문장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 내지는 보통 사람이 그에 해당될 것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 그랬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들과 찢어지지도 않은 상처를 애써 상상하면서 핑계 뒤에 숨어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은 것은 후회밖에 없다.


지금부터라도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고민하기 전에 노력부터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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