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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Jul 29. 2018

무간도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누아르라는 장르(Le Film Noir)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이를 단지 갱스터 영화라던지, 액션물 혹은 첩보/수사극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러한 사람 중 하나였다. 예고편이나 광고에서 누아르라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면서 봤고, 그 영화에서 조폭의 액션 활극이 펼쳐지면 그게 누아르인 줄 알았을 뿐이다. 그러한 선입견을 깨뜨려줄 만한 영화가 바로 <무간도> 트릴로지이다. 범죄 조직과 경찰과의 갈등을 넘어서 현대인의 정체성과 그 본질에 대한 질문을 쉴 새 없이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디 진영인(양조위 분)은 경찰이고, 유건명(유덕화 분)은 삼합회 조직원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첩자로써 서로 다른 조직에서 10년 남짓 몸을 담고 있는 상황이다. 경찰과 삼합회 모두 첩자가 있는 상황이고, 두 사람은 내부에서 나름 인정을 받고 있기에 양 측 모두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삼합회는 마약 거래 등 수익 창출의 길이 막히고 있고, 경찰은 번번이 코 앞에서 검거를 실패한다. 유능한 첩자들 덕이다.


그렇지만 영화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소 다르게 흘러간다. 첩자들의 활약과 이로 인한 양 조직의 갈등으로 인한 액션이 펼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범죄 조직과 경찰이 대립하는 영화라면 칼과 몽둥이, 그리고 총알이 난무하는 활극의 모습을 예상하기 쉽지만, <무간도>는 인물들의 고뇌에 집중한다. 그러면서도 진영인과 유건명, 이 두 사람에게는 강렬한 핀 조명이 쐬이는 것만 같다.


스스로를 규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계속 의문을 제기한다. 진영인은 경찰이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다. 원래는 둘이었지만, 영화 초반부에 경찰학교 교장의 장례식이 언급되며 황 반장(황추생 분)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게 된다. 그런 황 반장 마저도, 위장 수사 작전에 대한 비밀을 숨기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삼합회 조직원에게 살해당한다. 택시 위로 떨어진 황 반장의 시신을 보고 소리 없는 절규를 지르는 진영인의 모습은 스스로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경찰 진영인으로써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좌절감이 폭발할 것이지만, 그걸 드러내는 순간 삼합회에서 첩자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 있기에 감정을 삼켜야 되는 상황을 양조위는 특유의 눈빛으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무간도를 오마주했다라던지 리메이크했다고 하면 거의 모두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고 한다.


유건명은 삼합회의 일원이지만, 오랜 기간 경찰로 활동하면서 사회의 양지에 익숙해진다. 그러한 삶이 주는 다양한 편안함에 취한다. 조직의 도움으로 피라미들을 검거하여 고속 승진하면서 받는 사람들의 인정, 메리라는 약혼자의 사랑이 주는 안락함 등 삼합회에 속해있었다면 얻지 못할 그런 것들 말이다. 물론 주요 순간마다 조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지만, 그래도 쉼 없이 갈등하고 고뇌한다. 틈틈이 등장하는 약혼자 메리가 쓰고자 하는 소설의 다중인격 주인공의 선악 여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자신의 경찰 신분증을 대하는 그의 모습이 차차 변화하는 장면들은 유건명의 고민과 내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두 첩자의 내적 갈등은 영화 결말에 도달하면서 극적으로 치닫는다. 유건명은 진영인의 경찰 자료를 삭제하고, 진영인은 유건명의 약혼자 메리에게 정체를 폭로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호텔 옥상에서 그 둘이 대면하고 진영인이 유건명을 제압하는데, 그 뒤의 대화가 압권이다.


진영인에 감정을 이입하면 황당할만큼 답답한 상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유 : 나에게 기회를 줘.


진 : 어떻게?


유 : 과거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은 선한 쪽으로 선택하고 싶다.


진 : 좋아. 법정에서 그렇게 말해 봐. 기회를 줄 것 같아?


유 : 날 죽이고 싶은가?


진 : 미안, 난 경찰이야.


유 : 그걸 누가 아는데?



예고편에도 등장한 이 장면은 영화가 틈틈이 흘리던 주제의식을 명확하고 극적으로 전달한다.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람 자체인지, 아니면 주변인지.. 그것에 대해 영화는 묻고 있는 것이다.




환경이 인간을 만들고 그 반대 경우는 드물다. 

<무간도> 트릴로지의 3편인 종극무간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그만큼 사람은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이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가 함의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개 사람은 주변에 따라 바뀌고 심할 경우 매몰되기 까지 한다. 그래서 진영인과 유건명도 스스로의 원래 정체성과는 정반대의 환경에 몸담음으로써 그 영향을 받는다. 영화의 후반으로 가면서 볼 수 있는 약간의 자아분열적인 모습들은 두 인물이 각자의 주변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맞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본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특히 경찰임에도 범죄조직에 몸 담으며 악행을 습관적으로 저질러야 하는 진영인의 경우에는 이러한 모습이 더욱 돋보인다. 상황을 바로 잡아서 무간지옥과도 같은 자신의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발버둥 치고 있다. 어떻게든 자신이 경찰임을 증명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 인질극까지 감행하는 마지막 씬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발버둥은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진영인은 환경이 만든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에 실패한 것만 같다. 


영화 마지막에는 시작 때처럼 불경의 구절이 등장한다. "무간지옥에 빠진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는 말로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이 말은 경찰 진영인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살아남은 스파이 유건명이 앞으로 겪게 될 상황에 대한 예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진영인의 죽음 이후에 나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전자 쪽에 마음이 갔다. 그래서 씁쓰름한 마음으로 인간의 발버둥이 무의미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건명도 끝까지 발버둥 친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은 <무간도> 트릴로지를 완주하면 바뀌게 된다. 1편의 이전 배경을 설명해주는 2편(혼돈의 시대)과, 1편 이후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3편(종극무간)을 보게 되면 약간씩 불친절했던 <무간도>의 스토리라인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2, 3편이 완성도 면에서는 1편에 밀린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분히 상징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무간도>를 부연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3편에서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유건명이다. 그를 잡으려고 했던 모든 주연급 인물들은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것이다. 반쯤 폐인이지만 살아남은 유건명은 영화의 마지막 쯔음에, 손가락으로 모스 부호를 친다. 그 내용은 바로 지옥을 뜻하는 'HELL'이다. 꼬이고 꼬인 운명의 장난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결국 유건명이었다. 하지만 끝없는 무간지옥에서 썩어야 하는 것 역시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1편의 마지막에 언급된 '무간지옥에 빠진 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이 유건명이었고, 3편의 끝에 등장하는 말처럼 그는 "천만 억겁 동안 고통을 받게 될 것이며 영원히 무간지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결국 진영인은 환경을 바꾼 사람이었다. 본인과 정반대 성향의 삼합회에 10년 넘게 갇혀 있었지만, 그러한 지옥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였다. 그의 발버둥이 불면증과 자아분열적인 스트레스까지 주었지만, 진영인은 포기를 몰랐다. 환경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스스로의 자아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둘이라 함은, 진영인과 양금영(여명 분)을 의미한다. 둘 다 치열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다.


살아서 증명하지는 못하고 또 다른 내부 첩자에게 죽임은 당했기에 그의 노력은 얼핏 보면 실패한 것 같다. 그렇지만 길게 봤을 때, 그는 결국 경찰 신분을 되찾고 범죄 조직을 소탕한 영웅이 된다. (극 중에서 추앙받거나 하는 장면이 딱히 등장하지는 않지만..) 부가적으로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자 했던 그의 노력으로 인해, 수많은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생명을 부지한 삼합회의 첩자는 망가지게 된다. 최종적인 정의 구현까지 성공한 셈이니, <무간도>는 정말이지 매몰차게 현실적인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노력하는 자세와 함께, 변한 것은 환경뿐이고 '나는 결국 항상 나'임을 인지해야 한다. 진영인이라는 인물이 보여준 발버둥이 헛된 것이 아니듯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그리고 앞으로 해나갈 그런 노력도 헛된 것이 아니다. 항상 그랬겠지만 주체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환경에 매몰되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을 믿어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주변이 칭하는 것을 초월하여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는 힘을 믿고, 방심하지 말고 진영인처럼 노력해보자는 것이다. 


내가 '나'이기보다는 사회라는 커다란 환경 속에서 '하나의 톱니바퀴'로 전락하기 쉬운 세상이다.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는 치열함이 그래서 더욱이 필요하다.





스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헤더 이미지 출처 : https://ko.sayfamous.com/entertainment/film/2629082094926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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