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츤데레 Jul 04. 2018

이웃집에 신이 산다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을 넘어

신이 살고 있다. 


그는 본인이 최초로 만들었다는 벨기에 브뤼셀에 살고, 아내와 딸 에아가 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집 나간 장남 JC도 있긴 하지만. 신은 아주 마초적이면서도 괴팍한 남자이다. 굉장히 가부장적이어서 아내와 딸에게 폭력적이며, 본인이 창조한 인간들을 서로 싸우게 하기도 하고, 심심할 때에는 재난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심지어는 '골 때리는 고통 법'까지 만들기도 한다. 그 법 조항들은 이름 그대로 골 때리는데, '2129조 : 옷 벗고 욕조에 들어가면 전화가 울릴 것' 같은 식이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심술궂은 악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출하는 신의 막내딸, 에아


이러한 상황에서 딸인 에아는 아버지인 신의 행동에 염증을 느낀다. 신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컴퓨터를 활용해 지상에 모든 인간에게 '각자의 남은 수명'을 문자로 보낸다. 신이 만든 체계를 깨려는 일종의 복수인 셈이다. 그리고는 오빠인 JC의 도움을 받아 6인의 사도를 고르고 지상으로 내려가게 되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영화는 이렇게 지상에 내려온 에아와 사도들의 이야기이다. 

에아는 노숙자 빅터를 새로운 신약성서(Le Tout Nouveau Testament, 프랑스 원어 제목이기도 하다.)의 서기로 데리고 다니면서 여섯 사도를 만난다. 매력적이지만 사랑을 믿지 않는 외팔의 오렐리, 모험을 꿈꾸지만 평범한 사무직 업무에 짓눌려 있는 장 끌로드, 관음증이 있는 마크, 스스로를 킬러라고 생각하는 프랑스와, 부유하지만 외로운 맑틴, 그리고 남은 삶 동안 여자의 삶을 꿈꾸는 소년 윌리.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여섯 명의 일반 사람들이다. 


우리 주변에도 찾아보면 있을 법한 그런 사람들에게 에아가 해주는 기적이랄 것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니다. 바다를 가르는 것도 아니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거나, 다섯 개의 빵과 두 개의 물고기로 수 천명의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에아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각자의 음악으로 대표되는 그들만의 색을 찾아주면서 공감해준다. 그리고 빅터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성서로 기록해 나간다.


에아의 여섯 사도들. 프랑스 길거리에 다들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그야말로 성스러운 기록이다. 구약과 신약 모두, 절대자인 신과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지전능하신 분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기록이 세세히 담긴 종교적인 서적이다. 그렇지만 에아의 새로운 신약성서는 다르다. 신의 딸로 등장하는 본인의 이야기보다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성스러움의 주체로 인해서 객체로 밀렸던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서는 주체로써 담기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서술의 주인공이어야만 하는 존재는 일반 사람들에게 핀 조명을 내주고 어둠 속으로 스스로 물러난다. 에아는 조명이 없는 곳에서 담담한 내레이션으로 서술을 도울 뿐이다.




전통적인 남성적 권위주의를 깨려는 에아의 행보는 영화 마지막에서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아버지인 신이 만든 세상, 그리고 여기에 에아가 문자메시지로 반항한 세상은 어머니인 여신에 의해 리셋되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코드를 뺐다가 꼽게 된 여신은 본인의 취향대로 세상에서의 불필요한 파괴를 없애고 모든 걸 아름답게 만드는 데에 집중한다. 사람들의 수명은 다시 재조정되고, 하늘은 꽃으로 뒤덮이며, 사람들은 해저를 뛰어 놀 수도 있게 된다. 남신이 창조하여 가지고 놀던 세상은 여신의 재조정으로 인해 천국같이 변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골방에서 이런 심시티나 하면서 노는 신이라니...ㅋㅋ


우리가 알고 있는 전지전능하며 권선징악의 존재인 절대자 신은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성스러운 자태로 이상적인 선을 상징하는 신 또한 없다. (그런 걸 생각하면서 독실한 신자 분들이 본다면 약간 불쾌할 만한 장면들도 꽤 된다.) 항상 주체의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인 관점으로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는 권위가 아버지인 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이러한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이며 폭력적이기까지 한 권위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여성성을 제시한다. 사실 어떤 성질을 가지고 남성적/여성적이라고 하는 것도 성차별적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여성성은 영화가 말하듯 포용적인 관점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는 에아와 어머니 여신을 통해서 상대를 포용할 수 있는 여성적인 자세를 지향하자는 스탠스를 보인다. 남성성의 극단에 있는 신에 대비되게 말이다.




그렇지만 남성주의가 문제라고 해서 여성주의를 채택(?)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그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본다. 그동안 이러이러했으니, 앞으로는 정반대 개념을 중심으로 저러저러하게 된다고 해서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 일차원적인 함무라비 법전식 마인드이다. 그리고 영화니까 망정이지 현실이라고 생각해보면 여성인 어머니 여신이 만든 세상도 정상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물론 하루 이틀 정도는 재밌고 신기해서 좋을 수 있지만, 기존 모든 체계에 적응돼 있던 우리의 몸과 주변 생활은 엉망이 될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영상으로 보기 아름답기는 하지만 해피엔딩은 아닌 것 같다. 에아나 어머니인 여신이나 여성성 혹은 페미니즘의 승리라고 단정 짓기도 약간 무리가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결말은 꽤나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 극단이 주는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을 양 측의 장점을 적절히 활용하여 해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이렇듯 남성성과 여성성 중 하나를 강조해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조금은 포용적인 중용의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렇게 싸우지만 말고 조화롭게.


포용은 곧 인정이며,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의 반의어는 가부장제'(Bell Hooks)라고 했던가. 그걸 해결하는 관점에서의 포용적인 페미니즘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다만 어떤 하나의 사상도 모든 걸 통제할 수 없다. 최상의 시나리오 또한 만들 수 없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에서 다양한 관점들이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세상으로, 결국 나아갔으면 한다.





스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500일의 썸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