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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May 28. 2019

친절한 말하기의 중요성

말이 칼보다 무서움을 알기에

말하기에 대한 수업을 들으러 간 적이 있었다. 친한 형이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간 자리였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이야기들만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PPT 한 장을 보고 나의 생각은 뒤바뀌었다. 마늘 혹은 굼벵이처럼 보여서 낯설게만 느껴지던 망고스틴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그러던 중, 강사는 물었다.


"'오빠, 나 사랑하는 거 맞아?'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보기는 세 가지가 주어졌다.


① 당연하지~

② 아닌데?

③ 하... 그만하자 진짜


나는 저 세 개 중에서 1번이 그나마 그럴싸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늘 그래 왔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 찰나 강사의 부연이 이어졌다. 1번은 대다수의 남자들이고, 2번은 또라이고, 3번은 사이코패스라고 농담을 곁들였다. 나도 대다수의 남자였기 때문에 그저 웃으면서 그 순간을 넘겼다.


저 질문에 대한 진짜 정답은 따로 있었다. 그가 말했던 진짜 정답은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해서 내가 미안해.."였다. 그 한 문장을 들은 나는 토르가 늘 휴대하는 묠니르로 후두부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나의 말버릇과 일상, 그리고 관계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었다.


이 글은 그 반성과 성찰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반박이 불가능한 사실이다. 말은 뇌에서 생각한 문장이 발성을 통해 음파로 전달되는 과정이기에 당연히 뒤로 돌릴 수 없다는 물리적이고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더라도, 모두가 이를 알 수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말이 가지고 있는 리스크를 알고 있지만, 그저 알기만 할 뿐이다. 아무도 이 리스크를 헷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말을 '막' 한다. 


나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이다. 그들도 물론 머리로는 저러한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상황은 말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에 상대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것 같다.


옛 성현의 말이라는데, 틀린 것이 하나 없다.


나는 이러한 경우를 충분히 보았다.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 피해자이기도 했고, 가해자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는 나에게 모난 말을 상대가 해도 나는 웃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글서글하게 느껴지는 성격 좋은 친구이자 남자 친구, 혹은 부하 직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잘 상처 받지 않는 성격이라며 장난이라고 포장했다. 지금은 굳은살이 되어 별로 아픔이 느껴지지 않지만, 당시에는 꽤나 쓰라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해자였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방이 친구이건 연인이건 가족이건, 그들이 나를 신경 써주고 챙겨준다는 명목 하에 상처를 주었다. 편한 관계라는 핑계로 말이다. 한 마디를 꺼내기 전에 서너 번 생각해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꾸준히 실천하는 중이지만, 아무래도 상대방의 입장보다는 내 위주로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툭툭 뱉어버린 문장들은 상대의 가슴으로 날아가 꽂혔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위험성을 새삼 체감했던 데에는 몇몇의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가족과의 일이고, 하나는 연인과의 일이다. 그냥 흘려버릴 수 있는 말들이지만, 상대에게도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게 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참, 한심한 일이다.



#1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대화

내가 열 살도 못됐던 꽤나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가 즐겨(?) 묻는 질문이 있었다. 너는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부모님들의 클래식한 질문이었다. 지금은 그때 어머니가 왜 그러셨는지 막연히나마 알 것 같다. 내가 어릴 적 몸이 많이 편찮으셨던 어머니는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홀로 살아갈 아들이 걱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질문에 울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던 나는, 오기가 생겼는지 이렇게 대답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죠."


당시에는 웃고 넘어갔던 것 같지만, 어머니에게 이 대답은 꽤나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장난이라는 것은 서로가 머리로는 인지했지만, 가슴으로는 그러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인용하는 어머니에게, 지금까지 나는 사골 좀 그만 우리라고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드리고 싶다. 물론 죄송하다는 마음을 갖는 걸로 저 대화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죄송하다고 글로 쓰고 싶다.



#2 가장 길었던 나의 연애를 회상하는 기억

나의 가장 긴 연애는 3년의 추억이다. 지금보다 성격이 많이 모났던 탓에 다사다난한 연애였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것 같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커피를 마시다가 나눈 대화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빠랑 내가 안정적으로 잘 만나는 것 같아서 좋아."


"고마워, 나도 그래."


"이렇게 계속 만나고 그러면, 오빠는 나랑 결혼할 거야?"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굳이 따지자면 비혼주의자였고, 심지어 나는 25살로 결혼을 이야기하기에는 꽤나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보다 더 눈치가 없던 탓에 더욱 어버버하며 되지도 않는 솔직한 대답을 했다.


"음.. 아직 그런 이야기는 하기 이른 것 같고, 지금은 결혼 생각이 딱히 없는데... 

내가 서른 쯤 되고 다시 이야기하면 어때?"


이 정도가 당시의 내가 생각하는 솔직함과 배려를 담은 대답이었다. (지금은 비혼주의자가 아니다.) 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울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많이 미안했지만, 내 생각을 알겠다며 계속 만나면 잘 될 거라는 그녀의 대답을 나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물론 이 대화 때문에 헤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이 상처가 이별에 대한 하나의 이유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당시의 내 진솔함은, 그녀에게 다가가 수십 개의 칼날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칼날은 어떠한 노력을 해도 다시 되담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별 것도 아닌 내 실수를 나열한 이유는 말이 가지는 잔인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어머니는 물론 나를 용서하고 품어주셨지만, 이는 가족이기에 가능한 극단적인 예외일 뿐이다. 말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움은 하나의 인간관계를 갈기갈기 찢어 놓기 충분하다. 한 마디의 상처되는 말은 지금까지의 모든 행복을 태워버린다. 


꼭 말이 아니더라도.

단 하나의 카톡이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더 무서운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수많은 실수를 했다. 어떨 때는 그 실수가 아물기도 했고, 어떨 때는 작은 실수 하나 때문에 관계가 파탄 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난 다음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이 말 때문이었다. 


실수를 했어도 말이 모나지 않았을 때에는 오해가 풀려서 관계가 회복되었다. 반대로 별거 아닌 일에도 날카로운 말이 상대에게 전해졌을 때에는 관계가 복구되지 않았다. 내가 상대방의 말이 준 상처를 품고 있듯, 상대도 그렇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든, 그 정도로 똑똑하다.


잠깐은 웃으며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 가슴에 박힌 언어의 못은 어떤 것으로든 빼낼 수 없다. 상대가 친구든, 연인이든, 그리고 직접 한 말이든 카톡이나 메일이든 (물론 글자로 남는 것은 더 무섭다. 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조금은 호의적으로 변한 상대의 행동에, 당장은 상처가 없어진 것 같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과거의 상처는 더 큰 괴리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때 상처는 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친절하게 말하는 법을
공부해야 한다. 


사랑하냐고 물어봤을 때 미안하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함께하고 싶다고 말할 때 고마움을 표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굉장히 수고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을 함께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 앞으로 만나는 인연들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지금까지 스쳤던 인연들에게 무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참고로 처음 이야기한 수업에 나를 데리고 갔던 형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본인이 지금의 부인과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번도 상처되는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도 그처럼 소중한 사람을 만나면 그녀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게 해주고 싶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상당하다. 실패는 할 수 있더라도, 후회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찮아 보이지만 칼날로 변할 수 있는 말 한마디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가 상처 받더라도 상처는 주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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