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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Jul 14. 2019

아무 칭찬에나 고래가 춤추진 않는다.

칭찬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아는 속담으로,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상대는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참 많다. 단적이고 식상한 예시로는, 외모가 아쉬운 사람에게 '못생겼다'라고 하기보다는 '귀엽다', '성격이 좋다'라고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진짜 귀엽고, 성격이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최근 들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칭찬도 그러하다는 점이다. 내가 이를 알게 된 것은 한 2년 전쯤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이다. 나는 그냥 칭찬은 칭찬이고, 좋은 게 좋은 것인 줄만 알았다. 그렇지만 좋은 이야기도 상대에게 나의 좋은 의도대로 전달하려면 일종의 테크닉이 필요했다. 단어는 윤문을 해야 했고, 타이밍도 조절해야 했다. 좋은 말도 형용사나 명사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고, 타이밍에 따라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저러한 방식에 충실하게 입각하여 적절한 칭찬으로 상대를 기쁘게 해 주고, 갈등은 최소화시키는 친구들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A와 K이다. 이제부터는 그 두 명의 훌륭한 강사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들에게 레슨을 받고도 잘 바뀌지 않는 나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면서.




말을 예쁘게 하는 여자, A


그녀는 나의 첫 직장 동기이다. 나랑 많이 친하지는 않지만, 종종 나와 대화할 때 웃으며 혀를 끌끌 차는 친구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넌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묻는다. 예쁜 걸 예쁘다고 하고,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해도 안되냐면서 A에게 따지면,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아무리 칭찬이어도 그렇게 이야기하면 누가 좋아하냐고. 호감이 있다가도 싹 사라지겠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가장 생각나는 예시는 나의 이상형의 외모에 대한 것이다. 나는 조금 특이하다면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변태.. 스러운 것은 아닌데, 어디 가서 선뜻 말하기엔 조금 수줍은 이야기이다. 이곳에서의 익명성을 딛고 말해보자면, 나는 '웃으면 반달눈이 되면서 약간의 애교살이 튀어나오고, 그와 동시에 팔자 주름이 있고, 광대뼈가 적당히 튀어나왔으며, 약간의 다크서클이 곁들여진' 그런 여자를 좋아한다. 나는 그래서 지금까지 여자 친구나 썸녀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종종 했던 것 같다.


이 말을 들은 A는 기함을 했다. 어떻게 여자들이 그대로 들으면 기분 나빠할 만한 소재가 8할 이상 들어가 있는 말을 칭찬이랍시고 할 수 있냐고 하면서, 말이다. 조금 양보해서 상대가 나의 의도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꺼림칙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럼 어떻게 말하냐고 물어봤고,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는 게 예쁘고,
얼굴도 하트 모양이라
더 이쁘다고 해!


듣고 보니 정말 같은 표현인데, 느낌은 너무도 달랐다. 솔직하고 객관적이며 내 입장에서의 의견도 중요했지만, 칭찬이란 기본적으로 상대가 상대의 입장에서 듣는 말이란 걸 나는 간과했던 모양이었다. 내 말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훅- 들어오는 듯한 거친 느낌이라면, 그녀의 윤문은 세련되면서도 따스했다. 그리고 약간 귀엽고 수줍은 사춘기 소년의 느낌까지 났다. 내가 내 입장에서 매몰되어 단어를 골랐다면, 그녀는 철저히 상대방의 입장에서 단어들을 선별했을 것이다. 


이래서 내가 안되나 보다, 싶었다. 


두둠칫.png (일부러 번지게 했다, 실수 아님)


말을 사리며 하는 남자, K


그는 나의 대학교 친구이다. 나의 옆 옆 집에 살며, 나와 매일 연락을 하며, 나와 자주 게임을 한다. 가벼운 농담부터 연애, 이직, 재테크까지 다양한 방면에서의 이야기를 심도 있게 하는 친구이다. 그는 나에게 매번 '사리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로바로 반응하고 대꾸하기보다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 돌려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릴 때 나는 시종일관 미적지근한 그의 태도를 보고, '사림파'라고 놀렸다. 조선시대 사림파의 유명인사인 송시열을 빗대어, '신촌 송시열'이라고도 부르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나이를 하나둘씩 먹으면서 드는 생각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그가 120% 옳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연인관계든, 사회생활이든 간에.


그는 아무리 여자 친구가 잘못해도 다그치지 않는다. 일단 들어주고, 그다음에는 역지사지의 상황을 가정하여 본인의 기분을 돌려 돌려 설명한다. 이러한 과정을 지치지 않고 이어나가고, 그러다 보면 대체로 그의 여자 친구도 사태를 파악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완전히 바보가 아닌 이상, 차분하게 설명해주면 못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인관계가 법정도 아니기에, 상대가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몇 마디로 그 상황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깨닫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중요한 '사리기 기술'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그래도 안 풀리면 어떻게 하냐고 말이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 그냥
마포대교나 서강대교까지
한 시간 정도 걸었다가 오면 돼.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별 이상한 소리를 들어도 그는 크게 티를 내지 않는다. 뒤에서 나와 함께 욕을 하긴 하지만, 적어도 겉에서는 사린다. 그러다 보니 K의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적이 없고 둥글둥글하며, 말을 조심하는 사려 깊은 사람으로. 내가 보기에도 그는 그러하다. 약간 본인 스스로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림파의 말하기가 상대를 배려하고 편하게 해주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데, 나의 칭찬은 그러지 못하는 편인 것 같다. 아마도 올바른 표현법을 고르지 못했거나, 내 기준에서의 생각을 고집했거나, 혹은 적절한 기다림이 없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칭찬은 상대의 장점을 말해주면 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딱히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적절한 칭찬만이 댄스를 가능케하더라. (출처 : yes24)


칭찬 한 마디 조차 상대가 듣기 좋게 못하는 나를 보면서 종종 한심함을 느낀다. 사람들은 내가 재미있게 말을 잘한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을 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A처럼 상대의 입장에서 따스하게 말한다거나, K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삼키고 기다려주는 법을 진작에 배웠으면, 싶은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말을 줄이고, 글을 늘려보자고 브런치를 시작한 것도 어언 2년이 조금 넘었다. 그렇지만 과연 나는 내가 바라던 좋은 쪽으로 변했을까? 대답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오늘도 그렇게 변하려는 명확한 지향점은 가지고 있지만, 생각보다 나의 변화의 속도는 더디다. 나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 정도이니, 주변에게 어떻게 느껴질지는 다소 뻔하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소소하다면 소소한 습관 (잘 고쳐지지는 않지만)에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나는 지는 법을 잘 몰라서 포기도 잘 안 하는 편이다."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이는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내가 이길 때까지 지는 것을 감내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도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한 걸음씩 내딛고자 한다. 나도 상대의 입장에서 따스한 칭찬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글을 줄인다.


A와 K가 늘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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