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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Aug 27. 2018

한 사람에게 계기가 되어 준다는 것

어렵고 불편하지만, 분에 넘치게 감사한 사람들에 대하여

오늘만 살았던 시절이 있다.


20대 초반에는 청춘을 즐기고 싶어서 그랬고, 중반에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어서 그랬으며, 20대 후반에는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그랬다. 20대 초반이 젊음을 불태우고 싶었던 마음이라면, 중반부터는 취업 준비 등등의 현실이 버거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20대 후반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적은 나이도 아니고, 직장까지 찾아서 평범한 소시민으로의 길을 꾸준히 걸으면서 무슨 일탈 이냐고들 묻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랬던 이유는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기 때문이다.


충분히 불태웠던 20대였다...☆


나는 그 당시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최종 합격이 된 회사들 중에서 적절히 타협한 최적의 안을 선택했다고 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목표 중 어떤 하나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워라밸, 꿈, 재미, 돈, 성장... 하나라도 만족했으면 적당히 합리화하면서 스스로 토닥였을 텐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화가 났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온 것이 아닌데, 나의 부모님이 내가 이렇게 불행하게 사는 모습을 위해서 나에게 투자를 한 것은 아닐 것인데..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성실하게 삶에 임하면서도 나에게 일관된 애정과 관심을 보내는 두 분이 실패한 주식 투자자처럼 보이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심지어는 가장 친한 친구들의 연봉이나 환경을 보면서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을 느끼고 질투를 하기도 했다. 나는 정말 밑바닥이었다. 거울을 바라보면 토할 것 같았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줄 만큼 내가 모나게 되었을 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비록 이미 상처를 충분히 준 다음이지만.




퇴사를 결심하고, 주변을 설득하고, 실행에 옮겼다. 미래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퇴사에 대한 설루션이 확고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기민했다. 행복이 이데아라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불행이라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돈도 많이 못 벌면서 좌절할 것이면, 그냥 백수로 행복하게 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회사를 나오고, 몇 주 뒤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태어나서 가장 길게 떠난 여행이었지만, 마냥 마음이 편하거나 즐겁지는 않았다. 몸은 여행 중이었지만, 마음은 생각 중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장소들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 되려고 이럴까, 그리고 나는 무얼 하고 싶은가, 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고민의 결론은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글을 쓰고, 콘텐츠에 대한 기획안을 짰다. 혼자 숙소에 누워서 메모를 하고, 필요한 것은 인터넷에 찾아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노력 끝에 나는 지금 세 가지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다. 글, 글씨와 그림, 그리고 영상이 바로 그것들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외고에 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알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수능을 잘 보면 만사형통인 줄 알았고, 대학교 시절엔 학점과 스펙이 수능의 자리를 대체했다. 그렇지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들은 나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대다수가 행하는 그러한 행동양식은 리스크가 적은 만큼 리턴 또한 적었기 때문이다. 노력에 비해 얻어지는 것이 적었고, 그 노력 또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과정이 아니었기에 버거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작년까지의 삶과는 정 반대로 살아보고 있다. 말이 좋아서 콘텐츠지,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지금의 삶은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다. 불행이 -10이고 행복이 +10이라면, 현재 나의 삶은 +8 정도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스스로 뭔가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학교나 회사에 다닐 때보다 3배 정도는 바쁘고 할 일이 많지만, 오롯이 나의 일이고 나의 것이기 때문에 재미있다.


바쁠수록 행복하다는 기분을 처음 느껴봤다.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삶의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이 있다. 세 사람이다. 한 명은 거의 30년 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고, 나머지 둘은 알게 된 지 2년도 되지 않는다. 시간의 무게감은 다르지만 나에게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단 하나의 존재 : 어머니

그녀는 객관적인 사람이다. 내가 아들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필요하게 나를 높이지 않는다. 가끔은 내가 과소평가를 당하고 있는 기분일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따스한 사람이다. 이성적이지만 차갑지 않고, 할 말은 하지만 과묵하다. 편하면서도 어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완벽주의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완벽한 삶을 살았다. 딸, 선생님, 부인, 엄마, 며느리, 이모 등등.. 한국 사회가 부여하는 거의 모든 자격에서 최대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얼마나 다치고 삭는지는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받아주면 받아주는 대로, 그렇게 행동했던 것 같다. 일정 수준이 벗어나면 혼나기도 많이 했지만, 합리적이라면 그녀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날 믿어줬다. 그 덕에 내가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있었고, 몇몇의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나는 실망을 꽤나 주었다. 생각보다 결과물이 좋지 못한 상황이 야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퇴사까지 한다고 말을 하니, 그녀가 느낄 암울함의 무게는 측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이해해주었다. 아마도 내가 그녀의 아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퇴사와 관련하여 갈등도 꽤나 있었지만 결국은 날 보듬어주었다. "너는 위기에 강하니깐, 그냥 스스로의 배수진을 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라고 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건강도 성격도 망가져 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서. 그녀의 담담함은 나의 가슴에 살포시 꽂혔다. 나는 지금까지처럼 게으르고 타협을 하며 살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두 명의 친구 : M과 H

둘은 소중한 친구이다. 알고 지낸지는 2년도 안되었지만, 나의 세계를 바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셋이서 많이도 (처)먹고 다녔다..


M은 내가 누군가를 믿을 수 있게 해주었다. 원래 나는 아무리 친구라도 남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친한 몇몇 아니면 진심을 잘 여는 편이 아니다. 내 친구들도 그러한 나를 너무 잘 알기에, 날 보듬어준다. 그녀는 이러한 내 모습을 안쓰러워했다. 그냥 피곤하게 생각하고 넘겨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기엔 그녀가 착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러한 그녀조차 믿지 못했고, 서로가 상처만 받았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M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당시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방어기제가 이내 비겁함으로 느껴졌다. 스스로 한심했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적인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내 친구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대놓고 위로와 공감을 동냥하진 않으면서, 나를 만나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래서 나는 예전보다 더 그들을 신뢰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한 믿음의 외연을 넓혀갔다. 그러다 보니 선순환이 펼쳐졌다. 서로 더더욱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이지만. 그리고 그들의 도움과 응원에 힘입어 여러 일들을 하고 있다. 철저히 비경제활동이지만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나 혼자 잘난 맛에 살면서 아무도 믿지 않고 기대지 않았으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대답은 간단히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M에게 고맙다. 어머니와 비슷한 느낌을 다가왔던 그녀는 이렇게 조금이나마 나의 세상을 바꿔준 사람이다. 물론 어머니가 에스프레소라면, 그녀는 아메리카노겠지만.



H는 나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들어준 사람이다. 안 그런 척하지만, 그는 섬세한 사람이다. 툭툭 내뱉지만,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서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경청하는 편이다. M이 그랬듯, 그 역시 내 편에서 나에게 자극이 되는 말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별이 버거워 방황할 때엔 나중에 그녀를 스칠 순간을 위해 열심히 살라는 말을 해줬고, 브런치나 유튜브 등 여러 가지 고민만 하던 시절에는 일단 질러보라고 응원해줬다. 그는 내가 '스스로 빛났던 사람'이라고 했다. 제 멋대로긴 하지만, 철저하게 특유의 제 멋이 분명한 그런 존재라고 했다. 그의 성격 상 조곤조곤 이루어진 조언은 아니었다. 때로는 시크하고 가끔은 격했다. 그래서 조금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진심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와 닿는 법이다. 나는 그의 문장을 믿었고, 긍정적인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행동했다.


내가 요즘 치열하게 발버둥 치는 이유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나는 항상 날 바라보는 가족들과 내 가능성에 응원을 보내는 친구들의 마음을 밟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나 지나치다가 헤어진 여자 친구를 만났을 때에도 빛나고 싶었다. 원래 그녀가 좋아했던 나의 그 모습보다 더욱 반짝이고 싶은 마음이기에, 치열하게 살기로 했다. 그래서 쓸데없는 고고한 기획을 집어치우고 행동했다. 수면 밑에서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는 백조처럼 말이다. H 덕에 지금 글과 글씨와 그림과 영상을 만드는 내가 존재한다.





물론 위의 세 사람 이외에도 많은 도움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 인복이 많은 편이어서 그런지,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또한 민망할 정도로 감사한 일이다. 다만 저 세 명을 언급한 이유는, 그들이 나의 발버둥에 대한 핵심적이고 직설적인 에너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예전처럼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소 수줍지만, 진심입니다.


그들은 이제 존재 자체만으로 나에게 힘이 된다.


내가 아무리 일관성에 대한 강박이 존재한다고 해도, 사람이다 보니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저 세 명을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불안정한 나의 광기 아닌 광기를 목격했음에도 나를 믿어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한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돈 한 푼 못 버는 일에 집중한다. 그들이 나에게 박수를 쳐줄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믿기에 노력한다. 피곤하지만 보람찬 일상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나의 무의미를 무언가로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지금의 나의 존재에 대한 계기가 되어준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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