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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츤데레 Aug 27. 2018

유쾌함의 중요성

화를 내는 것은 가장 멍청한 짓

"사람은 자고로 유쾌해야 해."


친한 형인 J는 늘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알고 지낸 지 2년이 조금 안 되었지만, 저 말은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회사 동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먹은 밥공기의 숫자보다 저 표현을 들은 횟수가 더 많을 정도이다. 그만큼, J는 사람에 있어서 유쾌함을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유쾌함이라고 말하면 재미있고 유머 있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나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위트 있고, 적절하게 분위기 띄울 줄 알고, 분위기에 알맞은 농담을 하면 '유쾌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과도한 자신감이지만, 당시의 나는 나 스스로가 굉장히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J를 조금 더 알게 되고, 이야기를 나눠볼수록 그 정의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정한 의미의 유쾌함이란, 화를 내지 않는 평정심이다.




올봄, 미얀마에 갔을 때의 일이다. 고온다습한 날씨까지는 아니었지만, 그곳은 무더웠다. 놀러 간 것이지만, 체력적으로 힘들 때도 있기 마련이었다. 생각보다 큰 나라의 여러 도시를 이동하는 나름 빡센 일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J는 항상 웃었다. 그 당시에는 '형은 원래 저런 스타일이니깐.' 하고 넘겼던 것 같다. 그의 '형다움'에 약간의 고마움을 되새기면서. 


지금 생각해도 유쾌한 미얀마 with J


동행이던 H가 피로감을 토로하거나, 내가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맥주나 마시자고 징징거렸을 때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차분하게 농담을 섞어가면서 설득했을 뿐이다. 적당히 갈구기도 하고, 논리적인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형이라는 권위를 사용하거나, 모두가 동의한 일정이니 해야 된다는 압박은 없었다. 그 덕분에 너무도 다른 세 명의 여행이 평온했던 것 같다. 미얀마를 돌이켜보면 유쾌함만 생각난다.


열흘 정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미얀마 이후에도 나는 4주 정도 더 여행을 계속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평소에는 해볼 수 없는 경험들을 숨 쉬듯 스치웠다. 좋은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났기도 했고, 시간이 다소 지나 적당히 미화된 면도 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들과 더불어 불쾌하거나 당황스러운 사건들도 꽤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능글맞은 현지인에게 사기를 당한다거나, 아직도 뜨끈뜨근한 거대한 소똥을 밟아서 발과 샌들, 그리고 그 배설물이 삼위일체를 이룬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약간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이내 '인도니깐'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곳의 삶은 그렇게 흘렀기 때문에 감정적인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감정적인 동요가 금방 잦아들었기에, 화는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네?!'라고 느낄 정도였다. 


너...너냐?!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에는 안 그래도 예민한 내가 더 날이 서있었다. 주변 동료들과 친구들, 그리고 그 당시 만나던 여자 친구는 물론이고, 부모님까지 이에 대해 말씀하실 정도였다. 당시 어머니는 나에게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가지고 사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 표현을 상당 부분 이해한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저 잔소리로 흘려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와 내 주변 모두 피곤해졌다. 감정적인 예민함은 칼이 되어 상대를 베었고, 그 뒤에는 나를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조금 스스로를 놓았다. 

한국에서 너무도 꽉 쥐고 있었던 강박적인 사고를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나쁜 것을 체화하는 데에는 놀라울 만큼으로 시간이 조금 소요되지만, 그걸 빼내는 것은 정말 힘들다. 빼내는 것 자체가 성공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힘들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깔끔 떨고 민감하며 하나하나의 계획과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라는 나라는 나의 대척점에 있었다. 모든 게 계획과 어긋났고, 둔해야 살 수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에는 매우 당황했었고, 내 방식대로 견뎌보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곳은 나의 굳은 다짐마저 놓고 살게 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곳의 방식에 적응해갔고, 그러면서 생각지도 못하게 나의 날 선 모습들을 놓아갔다. 감정적인 평온함도 다소 찾으면서 말이다. 힘을 주고 하면 잘 안되다가 약간 힘을 빼고 했을 때 부드럽게 모든 게 흘러가는 것을 모두가 언젠가는 경험해봤을 것이다. 나에게 인도의 생활이 그러했다. 


그렇게 조금 무뎌진 것 같다.




1달 반 정도의 여정을 마치고 난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J의 회사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여전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분위기를 밝게 만들면서도 과하게 나서지는 않았다. 가끔씩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충분히 화낼 법해 보일 때 조차도 그는 유쾌했다. 그도 당연히 사람이니 가끔 얼굴이 벌게질 때는 있었지만, 이내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의 모습에 대해 인정과 이해를 하는 바이지만, 예전에는 참는 그 대신 내가 화난 적이 있다. '형은 저 사람이 그렇게까지 하는데 화가 안나냐'며 약간 흥분해서 따져 물었던 것 같다. 그러자 그는 특유의 느릿하고 차분한 말투로 내게 이야기했다.


"어떤 경우에서든 화를 내는 것은 가장 멍청한 일이야."


그 말에 대해 나는 씩씩거리면서 "그래도 정말 부당한 상황이고, 화를 못 참겠을 때도 있는데.. 그럼 어떡해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니 J는 "그러면 너만 피해를 본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다 그러더라고."라며 미소 지었고, 습관적으로 '그래서 사람은 유쾌해야 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은 나에게 상당히 큰 울림이었다. 2살 차이가 나는 형이지만 넓게 보면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또래에게서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유쾌함이란 둥글둥글한 평정심임을 배우고 있습니다.


2017년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가 훨씬 유쾌하다고 생각한다. 조금 무뎌진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공간도 생기고, 감정적인 동요의 폭과 분노 역시 엄청나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지금의 모습이 보기 좋지만, 둥글둥글함과 더불어 '그렇게 되는 과정'을 착실하게 복습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라고. 그래야 혹시나 작년과 같은 경우가 다시 발생했을 때, 돌아올 수 있지 않겠냐며 조언해주셨다. 단순한 '우쭈쭈' 스타일의 칭찬이 아닌 선배의 조언을 들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J로부터 받은 울림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항상 유쾌한 평정심을 지향하는 방향성을 견지하면서도, 혹여 방향을 잃을 때를 대비하여 되돌아오는 법까지 익히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도 꾸준히 노력 중이다. 쉽지는 않지만, 한 걸음 씩 걸어가고 있다.

다만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2019년의 내가 지금보다 더 '유쾌'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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