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선비 되기
내가 캘리그라피를 처음 시작했던 것은 2016년 겨울이었다. 운 좋게도 여러 군데 취업을 성공해서 할 일도 없었던 나는 그냥 친구들과 술이나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봐야 옷보다는 술을 사 먹을 것, 이라는 시처럼 말이다. 물론 그 시간이 아무 의미 없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며 이민을 고민하던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기도 했고, 결혼을 코 앞에 둔 친한 친구와 추억 팔이를 하기도 했다. 대학교는 동기이지만 나보다 사회생활은 빠르게 시작했던 친구와는 입사가 만사형통은 아님을 논하기도 했고, 그간 고마웠던 선생님들께도 문안을 드리며 건실한 사회의 일꾼(?)이 된 제자의 도리를 다하기도 했다. 다만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피폐해졌다는 게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꽤나 친한 후배 N이 있었다. 사진도 좋아하고, 그림과 글씨도 좋아하는 친구다. 인스타그램으로 눈팅을 하던 나는 N에게 말을 걸었다. 루틴 하게 보거나,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닌지라 고민에 고민을 더 했다.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라는 말이 있지만, 난 그때 한 서른두 번 정도는 고민하고 짧은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겉으로는 그리 소심해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기 조금 어려워하는 성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을 했던 이유는.. 서점에서 책을 몇 권 사서 보고 혼자 연습해도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쓰는 그런 글씨, 어떻게 하는 거야?"
"저도 혼자 연습해서 하는 거예요, 잘은 못해요 ^^;"
"그래도 쫌이라도 알려줘, 책은 읽어보고 따라 해 봐도 혼자서는 잘 감이 안 오네."
"그럼 내일 점심때 잠깐 봐요 ㅋㅋ 같이 조금 해보죠 뭐"
"고마워 내일 맛있는 거 먹자!"
다음 날, 나는 N을 만났다. 술 먹고 노는 것 말고 다른 식으로 시간을 좀 보내고 싶다, 라던지.. 선비가 서예를 하며 정신 건강을 가다듬듯 나도 이런 걸 조금 해보고 싶다, 라던지 하는 구차한 사족을 달았다. 다행히도 N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자신의 비법(?)들을 전수해주었다.
1. 힘을 빼고 쓸 것
2. 필기할 때랑 다르게 천천히 집중해서 쓸 것
3. 폰트로 타이핑한다는 느낌으로 글씨의 일관성을 줄 것
4. 구도 상의 밸런스를 맞출 것
5. (최종적인 목표이지만) 못 쓰는 글씨란 없으니 무조건적으로 따라 하기보단 본인만의 스타일을 만들 것
N의 조언을 되뇌며, N과 함께 몇 가지 문장을 따라 썼다. 물론 잘 안됐다. 왕년에 미술도 좀 했고, 동양화에 자신이 있었던 나인데 붓펜이 더 안됐다. 그나마 만년필이나 펜은 나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계속 연습을 했다. 다시 학교에 가봐야 했던 N은 나에게 몇 가지 장비에 대한 추천과 설명을 해주었고, N의 장비로 연습하던 그 길로 서점에 가서 붓펜을 샀고, 집에 굴러다니던 만년필과 펜으로 새로 산 방안지에 연습을 시작했다.
항상 글씨를 잘 쓴다는 칭찬을 받았다. 덩치가 산만한 남자였지만, 글씨는 다소 여성스럽다(?)는 코멘트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리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필기도 깔끔한 편이었고, 손 편지를 써도 이쁘다는 말을 들었으니 나름 객관적인 평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쓰는 글씨는 어려웠다. 캘리그라피라는 거창한 단어를 차치하고, 오롯이 글씨만을 위한 글씨를 써본 적은 없으니 그랬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글씨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써 보여주기 위한 미디어, 그마저도 요즘 워드프로세서와 이메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수단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만년필로, 펜으로, 붓펜으로 꼭꼭 눌러쓰는 글씨는 묘한 감상을 남겨주었다.
일단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일을 의미 있게 반복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약간 과하게 비유하면 '나 혼자 유유자적하는 재야의 선비' 같은 느낌까지 주었으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 책에서 읽은 표현들을 나만의 글씨로 눌러써보면서 그 텍스트의 의미를 되뇔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그리고 술 또한 줄일 수 있었다. 글씨를 연습하고, 글씨를 연습할만한 텍스트를 찾기 위해 책 또한 많이 읽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나는 캘리그라피를 시작함으로써 정말이지 많은 소소한 행복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은 행복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캘리그라피를 하는 입문 하여 연습하는 과정, 거기서 느낀 바 등등.. 나름의 노하우와 나만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사람들이 쉽게 캘리그라피를 시작하게 돕고 싶다. 내가 후배 N에게 드는 감정은 순전한 고마움이다. 사회에서 찌들 수밖에 없는 감성을 조금이라도 쉴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도움과 감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다. 캘리그라피가 모든 걸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의 그늘이나 탄산수 정도는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