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어릴 적 이야기
지난 글 <북악하늘길>의 끝 부분이다.
<대기만 한 시간 이상인 가게인데 웬일로 -중략- 의외로 콩국수가 더 좋다. 울 엄마가 맷돌에 갈아 해 주던 맛과 닮았다.
그 맷돌을 돌리는 건 내 담당이었는데… >
어렸을 적 여름이면 우리 집은 삶은 콩을 맷돌에 갈아 콩국을 만들고, 겨울에는 비지를 만들었다. 엄마가 콩을 구수하게 삶아 맑은 물에 여러 번 헹구어 콩껍질을 걸러 버리는 동안 아버지는 큰 함지박 위에 십자 모양의 나무받침을 올리고 그 위에 맷돌을 얹으셨다. 박박 씻은 맷돌은 물기로 반짝였다. 윗돌 옆구리에 난 홈에 나무로 된 어처구니를 꽂는다.
아버지가 맷돌을 돌리면, 나는 국자로 콩과 물을 적절한 비율로 떠서 맷돌 구멍에 부었다. 맷돌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기에 박자를 잘 맞추어야 한다. 드디어 아랫돌과 윗돌 사이에서 콩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난 아버지가 팔이 아플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빨리 어처구니를 잡고 싶어 했다. 언니들은 한 번 돌리는 척하다 다들 공부한다고 방으로 사라졌다. 얼마 가지 않아 맷돌 돌리기는 내 차지가 되었다. 자주 하다 보니 한 손으로 맷돌을 돌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 콩을 떠 넣는 것도 할 수 있었고 아주 신이 났었다.
아버지는 집안 곳곳 수리할 일이 있을 때면 늘 내게 보조를 시켰는데 그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아버지 곁에 쪼그리고 앉아 드라이버, 렌치를 집어 드리다 어느새 전선 피복을 벗겨 연결하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로 했다. 아홉 살에 오옴과 헤르츠의 의미를 배웠고 그때 한참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의 전자시계가 자꾸 느려지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런 상식을 알려주던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었다.
60년대, 급속한 인구 증가로 주변에 건축자재인 판재나 자갈 더미 모래 더미가 흔하게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동네 아이들의 놀잇감이기도 했다.
모래 위에 앉아 한 손 위에 모래를 두툼하게 얹고 텁텁 두들겨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이 놀이는 클래식이다.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 시원한 모래의 촉감.
자갈 더미에서 반질반질한 공깃돌을 골라 공기놀이와 모둠공기놀이를 했다. 200개도 넘는 공깃돌을 한 번에 펼쳐놓고 공기를 하면서 꺾기를 한 만큼 돌을 따가는 모둠공기는 전투력을 급상승시켰다. 공깃돌이 많으면 부자였으니 얼마나 좋은가 ㅎㅎ.
나는 공사장에서 대패질을 구경하는 것이 일 년에 한 번 오는 서커스 구경보다 재밌었다. 나뭇결을 정돈하며 나오는 대패밥은 종잇장처럼 얇아 돌돌 말려 나오거나 가루가 되어 밑에 쌓였다. 나뭇결이 뚜렷한 대패밥에서 나는 막 깎은 나무의 향긋한 냄새와 리듬감 넘치는 대패질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곤 했다.
한 아저씨가 궁금해하는 내게 대패를 만져보게 허락해 준 날이 있었다.
작은 손에 너무나 컸던 대패. 쉬워 보였는데 절대 쉽지 않았다. 숙련공의 거침없는 대패질을 오해했다. 작은 손으로 대패질이 될 리가 만무했다. 아쉬웠다. 우리 집엔 웬만한 공구가 다 있었지만 대패는 없었다.
판재 더미에는 장난감이 넘쳤다. 그중 가시 없는 긴 나무 막대기를 골라내 한쪽을 손으로 잡을 만큼 남기고 작은 막대기 하나를 가로로 못 박으면 그럴듯한 장수의 검이 됐었다. 검을 휘두르며 동네 꼬맹이들을 이끌고 이웃동네 꼬맹이들이랑 허구한 날 전쟁놀이를 했었다.
딱지를 수십 개 접어 우리 동네 남자아이들 평정에 나서는 건 다반사였다. 여자면서 딱지치기를 하는 애는 나 밖에 없어서 동네 아줌마들한테 은근히 눈총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 따버려서 여러 애 울렸으니까 ㅋㅋ. 00아 밥 먹어~~ 엄마들이 부를 때까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도 딱지치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여자애들끼리 고무줄놀이를 할 때 남자애들이 고무줄을 채가는 일이 그들의 스포츠였지만 나는 뺏겨본 적이 없다. 그 까만 고무줄은 지금도 문방구에서 파는지 궁금하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난 키가 컸고 통통했다. 일 학년땐 우리 반은 90번까지 있었는데 뒤에서 두 번째로 키가 컸다. 당시 한 반에 90명은 흔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오전 오후 2부제였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키작녀다. 일찍 성장이 멈춰 키로 번호를 매기던 마지막 학년에서 난 6번이 되었다. (윽!) 그즈음 시력이 나빠져 칠판 가까이 앉게 된 게 썩 나쁘진 않았다.
그땐 책을 전집으로 사는 게 유행이었다. 작은 방과 마루에는 온갖 세계전집들과 백과사전이 방바닥부터 천장까지 꽂혀 있었다. 벽 한 면을 다 채우도록 많은 책을 몇 번씩 읽었다. 오지게 개구쟁이였지만 밤늦도록 책도 많이 읽었는데 책을 읽고 있으면 그보다 더 재미난 일이 세상에 없는 듯 좋았었다. 낮엔 힘껏 노느라 밤엔 독서하느라 참 바쁜 어린 시절이었다.ㅋㅋ
그때는 국민학교만 의무 교육이었다. 언니는 중학교 입학조차도 입시를 치르던 세대였다. 언니는 명문중학교에 간다고 재수를 했다. 대학도 아니고 중학교 입학하는데 재수라니… 밤늦도록 과외받고 학원 다니던 중, 언니가 교통사고로 다리에 깁스를 했던 적이 있다. 엄마 아버지가 언니를 업고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학원에 데리고 다녔었다.
어린 나이에 입시지옥을 겪는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몇 년 늦게 태어 난 덕분에 난 운 좋게도 추첨으로 8학군 명문여중에 입학했다 ㅋ.
부모님은 내게 공부하란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기억엔 단연코 없다.
대신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엄마의 잔소리가 있었으니 ‘옷 버리지 마라.’!
세탁기가 없던 시절, 웬만한 남자애보다 더 거친 개구쟁이 딸을 키웠던 엄마는 빨래가 늘 걱정이었다. 옷 버리지 말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내 자식한테는 그 말을 안 할 거라고 작정했었다.
옷 버려도 좋으니까 맘껏 놀아라~~
다행히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땐 세탁기가 등장해서 그 말을 아주 쉽게 지켜낼 수 있었다.
우리 동네 바로 앞에 학교 운동장만 한 늪이 있었다. 물이 얕은 곳은 뱀이랑 개구리가 살았고, 물이 무릎까지 차 있던 곳은 미나리가 많아 미나리밭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엄청 많은 미꾸라지가 살았는데 거머리도 많았다. 거머리가 다리에 붙으면 소오오름이 끼쳤다. 미꾸라지는 그 이름을 괜히 얻은 게 아니다. 바글바글 몰려있어도 손가락 사이로 얼마나 잘 빠져나가는지 잡히지 않아 약을 단단히 올리곤 했다.
그 늪은 겨울엔 어린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아버지가 짜준 썰매를 타고 뺨이 얼어 살갗이 쩍쩍 갈라질 때까지 놀았다.
한강이 강바닥이 보일 만큼 맑았었다는 걸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산업발전과 강이 더러워지는 속도는 비례했다. 급기야 한강 물 위에 오물과 쓰레기가 둥둥 떠 다녔다. 88 올림픽으로 외국 손님을 맞느라 부랴부랴 강이 정비되어 지금의 모습이다.
예닐곱 살쯤이었다. 언니들과 동네 언니들 몇을 따라 뚝섬부근으로 수영을 하러 갔었다. 집에서 한양대학교정문을 지나 언니들을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그게 중랑천이었는지 한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언니들이 뚝섬 간다고 했으니 한강이었을 거다.
강에 도착해 얕은 물을 찾아 들어갔다. (강에서 건축용 모래를 대량으로 채취하기 전, 강바닥이 얕은 곳이 많았다.) 물 깊이가 가슴 정도였다.
모두 물장구치며 노느라 정신없을 때 혼자 균형을 잃고 그만 물을 먹고 말았다. 강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는데 정신이 아득해지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시야에는 맑은 강물이 무지개 색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게 보였고 강바닥의 모래가 유난히 반짝였다. 그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물속에서 언니들의 다리와 몸통이 너무나 선명히 보였지만 손이 닿기엔 멀었다. 어쩌지 나 죽나 봐 하던 순간 죽을힘을 다해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놀고 있었다. 머쓱해진 나도 아무 일 없었던 듯 또 놀았다.ㅎㅎ
이게 다 서울 한복판에서 있었던 옛이야기다.
매년 홍수와 가뭄을 겪고 수돗물이 끊기는 일도 정전도 흔했던 그 시절은 이젠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편리함으로만 따지면 세계 일등인 나라가 되었다.
많은 것들이 편리해져서 좋지만
지금이 그때보다 좋은 점을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뭐니뭐니해도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산을 꼽으련다.
그때는 민둥산이란 말이 있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의 산은 나무 한 그루 없이 황토가 드러난 뻘건 민둥산이었다. 비가 오면 홍수가 일어났고 조금만 비가 안 와도 가뭄으로 이어졌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널 때 일본 땅의 푸르다 못해 검은 산을 보고 화도 나고 부러워 죽을 맛이었다.
우리 산도 푸르게 된 지 좀 됐다. 이젠 실속 있는 수종으로 바꿔나가는 치림계획이 있길 바래본다.
까맣게 잊고 있던
오래오래 묵은 기억들이 와르륵 떠올랐다.
오랜만에 맛본
맷돌에 갈은 콩물 맛을 닮은 콩국수가 고맙다.
콩을 구수하게 삶아야 맛있는 콩물이 된다.
태워도 안되고 설컹해도 안된다.
울 엄마의 콩 삶는 솜씨는 최고였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어선가,
돼지뼈 국물을 진하게 우려내 우거지와 함께 끓인
수수하고 구수한 비지가 그립다.
맷돌로 갈아야만 나는 맛이라 더욱 특별하다.
그 옛날 보통집은 맷돌을 돌려야만
콩국수를 먹을 수 있었고,
지금은 언감생심
맷돌을 돌리는 건
보통집에선 하기 힘든 호사스러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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