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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BRICKS Nov 25. 2017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

나는 이 동네를 어떤 음악들로 기억할 것 같다

 상수동에 처음 살았던 게 2003년 즈음이었다. 그때 상수동은 홍대 앞에 비해 월세가 저렴한 동네였고, 지금처럼 카페가 곳곳에 숨어 있지도 않았다. 29살이던 나는 자전거를 타고 광흥창역에 있던 직장까지 출퇴근을 했다. 2년 정도를 살다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지만, 상수동은 오랫동안 내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아마도 자전거를 타며 오가던 골목길의 풍경들, 주말 아침이면 밤을 새며 놀던 젊은이들이 술에 취해 택시나 버스를 기다리던 풍경 같은 것들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작년 말, 상수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재미있는 건, 15년 전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자주 들르던 가게들도 대부분 남아 있고, 심지어 그때 살던 집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괜히 감상에 젖기도 하는데, 왠지 그때 매일 같이 갖고 다니던 아이리버의 MP3-CDP도 하나 장만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런 생각은 바로 지워버린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아마도 오랜 습관 같은 것이겠지만, 음악적 풍경에 관심이 있다. 음악적 풍경이란, 어떤 장소와 어떤 음악이 밀착되는 경험이다. 요컨대 우리는 음악을 장르나 스타일 혹은 음악가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과거의 어떤 장소나 순간의 기억이 음악과 밀착될 때가 많다. 장소가 먼저일 때도, 음악이 우선될 때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환기’다. 다니던 대학 캠퍼스에 들어서면 그때 유행하던 음악이 갑자기 떠오른다. 20년 전의 음악을 들으면 갑자기 그때 좋아했던 여자애나 남자애가 떠오른다. 이름도 얼굴도 막연하지만 그때의 그 기분이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음악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본다. 기억을 환기하는 것, 이를테면 잊힌 과거를 지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걸 통해서 눈앞의 어떤 풍경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비로소 실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요즘 상수동에서 그런 순간들을 자주 만난다.


 ‘여기에서 내가 뭘 했었지’라든가 ‘아 그때는 스웨덴 인디 록을 엄청나게 들었지’라든가. 그때 함께 시간을 나누던 친구들, 선배들, 동료들의 얼굴과 이름이 스쳐 지나고 문득 전화기를 꺼내 그들의 연락처를 뒤적일 때도 있다.


 “어, 형. 오랜만이네. 한 2년 만인 것 같지? 잘 지내나? 나는 요즘 상수동에 살아. 응, 조만간 만나. 이 동네에 괜찮은 LP바를 찾아 놨어. 응, 꼭 보자. 응, 형수님에게도 안부전하고.” 


 이런 대화를 나누며, 이 동네로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상수동에는 제비다방이 있고, 그곳은 여전히 음악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다. 하지만 내게는 조금 낯설고 어색한 장소기도 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처음부터 내게는 너무 힙한 곳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오히려 나는 약간 숨어 있는 장소들, 겉과 속이 조금 다른 인상을 주는 장소들을 좋아하는데, 상수동에서 그런 곳을 꼽으라면 두 군데가 떠오른다.


 하나는 동네 서점인 ‘베로니카 이펙트’, 다른 하나는 LP바 ‘리플레이’다. 베로니카 이펙트는 그림책 전문 서점이다. 정기적으로 소규모 그림교실이 열리기도 한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나는 동네 산책 중에 우연히 이 가게를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서점의 주인이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밴드 ‘포니’의 베이시스트 유승보 씨였다. 안면은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통성명을 하면서 무척 반가워했던 기억. 포니의 음악에 대해 썼던 글을 기억해줘서 나름 기쁘기도 했고, 개인 프로젝트로 발표할 음악에 대한 이야기와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 가끔 지나치며 마음속으로 안부를 전하고 있다. (내가 의외로 숫기가 없어서…….)



 리플레이라는 LP바는 동네로 이사 온 직후, 집 앞에 생겨서 한 번 들렀다가 단골이 되어버린 술집이다. 사실 LP바가 유행하면서 LP를 장식으로만 쓰고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트는 가게들도 많은데, 그러면서 나는 첫 방문에 반드시 어떤 음악을 신청하고는 그게 있는지 없는지로 그 가게를 품평하는 습관이 생겼다. 일종의 ‘평론가의 심술’ 같은 건데(사실 그런 기준은 있으나마나한 것이니까), 리플레이는 바로 그 음악을 딱, 틀어줘서 좀 놀랐던 곳이다. 마크 알몬드의 1집에 수록된 <러브>라는 곡으로, 총 11분 4개 파트로 구성되어 쉽게 틀기에도 애매하고, 한국에선 그리 유명하지 않은 앨범이라 존재 자체가 드물기도 하다. 그날 밤, 이 곡을 1971년 오리지널 LP로 들으면서 너무 기쁜 나머지 위스키 한 병을 시켜 만취할 때까지 마시면서 사장님과 얘기를 나눴다. 그 뒤로 사장님은 내가 가게에 들를 때마다 이 곡을 틀어주신다. 그러면 나는 모종의 동료의식 같은 것마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음악은, 그러니까 내게는 분명히 장소의 부산물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도 나는 이 동네를 어떤 음악들로 기억할 것 같다. 그 이야기는 설명한다고 전달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오직 나만의 것. 나만의 추억. 나만의 시간. 나만의 이야기다. 바로 그 점이 정말로 사랑스러운 것인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어떤 장소와 어떤 음악과 어떤 기억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면 그게 또 그렇게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마크 알몬드와 리플레이, 베로니카 이펙트와 포니의 “안녕” 같은 노래들이 바로 지금의 기억을 환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음악이 미래의 나를 이끄는 것. 나는 이 동네를 산책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을 기억하고, 어떤 근사한 미래의 한 순간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글 차우진 / 사진 베르고트

글쓴이 차우진은 1999년 음악평론을 시작하여 2001년부터 음악웹진 [WEIV]를 운영해 왔다. 《청춘의 사운드》, 《한국의 인디레이블》, 《아이돌》 등의 저서가 있다.

https://brunch.co.kr/@woo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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