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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Nov 09. 2018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도쿄 특집 #4 : 니혼바시

BRICKS Trip - 도쿄 특집호 #4





 “あの… すみません. 失礼ですけど(저… 미안합니다. 실례합니다만…).”


 나무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열어 조용히 가게 안으로 몸을 옮겼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고, 괜히 눈물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내에선 이 섬나라 수도의 기나긴 장마 습기를 함뿍 먹은 특유의 냄새가 난다. 아마 종이신문과 중앙 나무탁자에서, 그리고 그 시절 그렇게 지겹게 맡아왔던 난로 위에 걸린 젖은 수건 마르는 냄새일 것이다.


마이니치신문 보급소가 있는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서울로 치면 여의도와 송파를 합쳐 놓은 듯한 느낌이다. 사무실빌딩과 주택가의 조화가 어우러진 세련된 도시의 느낌이랄까.


 20년 전, 외롭던 일본 생활을 버틸 수 있게 도와준 신문보급소.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었기에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곳. 그리고 20년 만의 도쿄 방문.


 동유럽 슬로바키아를 출발한 나는, 당시의 인연을 찾아가는 일정을 잡았다. 이내 이곳 신문보급소 미닫이문 나무 손잡이를 잡고서, 그때의 시공간으로 들어갔다.


 “はい, どなたです…? あ, もしかして…(네, 누구신지…? 아, 혹시…).”

 “社長! 店長! そうです. ぼくです. ドンソブです(사장님! 점장님! 그래요. 저예요. 동섭이에요).”


 반가움과 나를 잊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점장과 사장 모두를 끌어안고 20년의 해후를 막 맞이한다.


 혈기왕성했던 20년 전을 뒤로하고 이젠 모두 40대, 50대, 60대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때로는 두려웠고 불편했던 그들이지만 지금은 그들도 나도 영락없는 중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니혼바시의 명물 닝교야키(인형모양의 구운과자) 가게 앞 사장님(65세). 유럽에는 없을 게 분명하니 꼭 챙겨가라면서 한 아름 구입 해준다.


 일본 47개의 도도부현* 중 도쿄를 가장 좋아하는 나. 그리고 도쿄에서 나고 자라 일본인이라기보다는 에돗코(江戸っ子. 도쿄 토박이)라는 겸손함과 여유로움이 몸에 배인 이 두 명의 아저씨. 수다는 끝이 없다.


 “あのさ, お前さ, 今日夕食だいじょうぶだろう(있잖아, 너 말야, 오늘 저녁식사 괜찮은 거지)?”


 무뚝뚝하지만 애정이 담긴 말로 사장이 저녁식사 제안을 한다.


 “当り前ですよ. いっぱいします. はは(당연하죠. 한 잔 해야죠. 하하).”


 사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단골식당에 다행스럽게도 자리가 있나 보다.


산책로와 라멘집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 있어주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고마울 따름이었다.


 장마철 저녁식사 무렵의 도쿄 니혼바시 빌딩가 새하얀 불빛은 무척이나 몽환적이다. 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는 동질감은 잠시, 이내 그들의 디테일하고 고집스런 일처리의 산물인 주위 모든 것들이 무척 ‘있어 보인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어쩌면 이 분위기가 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야릇한 흥분도 느낀다.


 그리고 20년 전. 서울의 친구에게서 걸려온 국제전화. 자전거에서 급히 내려 핸드폰 수화기 너머 들었던 어머니의 급작스런 사망 소식.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저녁과 다음날 아침 먹을 반찬을 사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함께 슬퍼했던 아저씨 둘과 지금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아저씨 세 명이 들어간 곳은 ‘모쓰야키(もつ焼き. 돼지내장구이) 전문점. 일본어가 아무리 어느 정도 유창하더라도 일본인 동행 없이는 왠지 들어가기 두려운 느낌의 가게다. 호기 있게 들어가 이것저것 물어보며 주인장의 기분을 언짢게 하거나, 다른 손님들의 힐끔거리는 소리를 듣고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나는 그렇게 대범하지 못하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곳이 아닌, 퇴근 후 직장인들의 해우소 같은 곳이기 때문인지라.


 가게 안 자리에 앉자마자 사장이 나를 가게주인에게 소개를 한다.


 “こいつよ, 20年前でうちの店でバイトやってんだんだよ. それでさ, 今日こいつが俺会いに急に来たんだよな(이 녀석이요, 20년 전에 우리 가게에서 알바했던 녀석인데, 나 만나러 갑자기 여기 왔잖아).”


 그러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며 “どこだっけ? スロバキア(어디라고 했지? 슬로바키아)?"


 발그레 달은 얼굴이지만 약간 으쓱하는 느낌이다. 순간 가게 안의 샐러리맨들이 나를 주목하며 눈인사를 건네고, 어느 풍채 좋은 부장급으로 보이는 이는 들고 있던 아츠칸(熱かん. 따뜻하게 데운 사케) 잔을 들어 자신의 눈높이와 맞춘다.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홋카이도 출신 대학생 나카야中屋 씨가 몇 해 전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고, 야구를 좋아하며 나와 캐치볼을 자주 했었던 네모토根本 군은 변호사가 되어 가끔 신문보급소를 찾아온다고. 그런 이야기들.


모쓰야키집에 들어왔다. 그냥 혼자 여행을 왔다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장과 점장은 아오링고 사와를 마시더니 취기가 오르자 아예 병당 1만 엔짜리 고구마 소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신다. 나도 이에 질세라 하이볼에서 위스키 스트레이트로 바꿨다. 하쿠슈 12년과 야마자키 12년, 모두 산토리 제품인데 아마 가격은 사장이 마신 소주의 2배쯤 될 것이다. 사와는 탄산에 소주를, 하이볼은 위스키를 섞은 것이라는 사장의 말을 들었을 때 즈음부터 취기가 올라온 것 같다.


 귀가 윙윙거린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계속 웃음이 난다. 술이 들어가니 일본어가 더 자유롭다. 지역 시의원하고도 명함을 주고받으며 건배를 한 기억이 가물거리고, 사장은 아마 그에게 교수님이라 부르며 굽신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적막한 도심 골목 곳곳에 숨어있는 작은 술집들. 그들로 인해 도시의 중후함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밤늦은 도쿄의 사무실 거리는 조용하다. 과연 생명체가 살고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적막함. 하지만 그 사이사이 자그마한 가게 창문 틈 사이로 간간이 새어 나오는 샐러리맨들의 웃음소리가 이곳에는 지구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매서운 추위에 함박눈이라도 내린다면 아마 성냥팔이 소녀가 손을 호호 불면서 이 길을 걸어가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본다.




<도쿄 나리타 행 비행기 탑승 24시간전, 동유럽 슬로바키아에서>


나는 도쿄가 좋다.

현대 문명의 고단함과 풍요로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묵묵한 진한 나무색의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고 내 청년시절 가장 아름다웠을 때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곳.

장마철 빗소리를 들으며 끼니를 해결했던 소박한 아파트 앞 덮밥집과 골목 라멘집.

나를 매일 아침 학원과 숙소로 실어 날랐던 도쿄의 마루노우치센丸の内線.

그리고 무엇보다 고마운 사람들… 외국인인 나를 위해 항상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들….

북구 문화센터의 자원봉사자 야마모토, 카와다, 최미려, 다카키, 나가이 상.

니혼바시 마이니치 신문보급소의 고바야시 사장님, 야마시타 점장님.

저를 혹시 잊은 것은 아닌지요. 그동안 연락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도쿄로…

지금, 만나러 갑니다…




* 도도부현(都道府県): 일본의 행정구역은 1토都(도쿄토), 1도道(홋카이도), 2부府(오사카후, 쿄토후), 43현県(후쿠오카현, 후쿠시마현 등) 47개로 구성되어 있다.




글/사진 최동섭

슬로바키아 14년차로 삼성전자 슬로바키아 법인에서 9년 근무 후 독립했다. 현재 슬로바키아에서 CDS Korea라는 기계설비무역 및 여행코디네이터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동유럽/일본/한국에 자신만의 놀이터를 하나씩 만드는 게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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