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를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파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진심이 담긴 한 줄의 문장. 그게 다였다. 내가 헤밍웨이 문학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된 이유 말이다. 대학원에 온 지 1년하고도 반이 지났을 때, 학점을 채우기 위해 20세기 모더니즘 미국 소설 수업을 들었다. 내 전공은 19세기 빅토리아 영국 소설이니 시대도 국가도 완전히 다른 문학을 다루는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오리엔테이션 날, 수강생들끼리 한 학기 동안 각자 어떤 작품의 발제를 맡을지 가위 바위 보로 정했다. 난 계속해서 졌다. 결국 얼떨결에 헤밍웨이 작품의 발제를 맡게 되었는데, 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이 내 인생 몇 안 되는 결정적 순간이라 믿고 있다.
내가 맡았던 작품은 헤밍웨이의 첫 장편소설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였다. 쉽게 읽혔지만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하고도 일곱이 되던 해, 그러니까 지금의 내 나이와 꼭 같았던 때, 그는 이 소설을 썼다. 그 나이에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시대의 아픔을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그의 통찰력에 놀랐다. 작품의 초반부는 프랑스 파리, 중반부부터 후반부까지는 스페인의 팜플로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는데, 나는 특히 작품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초반부에 마음을 빼앗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며 파리로 건너온 미국 젊은이들의 모습이 사실적이고 진솔하게 담겨있었다.
헤밍웨이를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파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헤밍웨이와 파리는 하나의 세트였다. 그가 20대 청춘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이자, 그가 만들어낸 등장인물들이 허무감에 휩싸여 술과 환락에 취해 그토록 휘청거리고 다녔던 도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열다섯 번째 완독하던 날 밤, 당장 파리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로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에 온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같은 도시를 세 번 이상 방문하는 것이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지만, 파리는 유난히 돌아설 때마다 다음을 기약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날 눈이 내렸다. 헤밍웨이는 파리의 겨울이 혹독하고 고약하다 말하곤 했지만 눈 내린 파리는 그의 말이 무색할 만큼 아름답고 고요했다.
내가 파리에 간 이유는 하나였다. 마음껏 길을 잃어보기 위해서.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았다. 무엇을 할지 계획하지도 않았다. 비르하켐 다리 위에 서서 푹 삶은 와이셔츠처럼 새하얀 눈이 포근히 길 위에 덮여가는 것을 보며 발길 닿는 대로 이 도시를 무작정 걸어보자 다짐했다.
한 손엔 따뜻한 핫초코를, 다른 손엔 카메라를 들고 어깨 위에 가만히 내려앉는 눈을 이따금씩 털어내며 쉬지 않고 걸었다. 무수히 많은 카페와 술집, 그리고 레스토랑들을 지나쳤다. 걷다 보니 우연히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주인공 제이크가 친구인 로버트 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라브뉘 식당도 마주쳤다. 작품에서 제이크와 그가 사랑하는 여자 브렛, 그리고 콘과 빌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정말이지 쉴 새 없이 파리 전체를 휘젓고 다닌다. 그들은 좀처럼 한 곳에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끊임없이 이 카페에서 저 카페로, 이 클럽에서 저 클럽으로, 또 다시 술집에서 술집으로 옮겨 다닌다. 커피값과 술값을 도대체 무슨 돈으로 감당하는 것인지 의아해 질 정도다.
마치 끝없이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그들은 충족되지 못할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목구멍으로 샴페인과 위스키를 털어 넘긴다. 등장인물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카페를 전전하는 일상과 별로 다를 바 없다. 특히 브렛은 카페와 술집을 옮겨 다니는 것처럼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금방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미련 없이 떠나버린다.
이 소설에 뭐 대단한 플롯이 있는 건 아니다.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고, 택시를 타고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고, 그 술집에서 또 다른 친구를 만나고, 또 다시 다른 클럽으로 가서 사람들을 만날 뿐이다. 이런 식의 플롯이 반복되는 것으로 소설의 초반부가 흘러간다. 서사가 비교적 뚜렷한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에 익숙해져 있다면 당혹스러울 만하다.
밤낮으로 파리 거리를 헤집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꼭 길을 잃은 사람들 같다.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은 술에 취해 있고 향락을 좇고 있으며 정해진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당대의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자신의 살롱으로 불러 그들에게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거트루드 스타인 여사는 1920년대 전후 작가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길을 잃은 세대요.” 이때부터 ‘길 잃은 세대(lost generation)’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환멸감에 빠진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스타인 여사의 이 말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에피그래프가 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삶의 이정표를 상실한, 바로 이 길 잃은 세대들이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남기고, 상처는 흉터를 남기기 마련이다. 제이크와 그의 일행은 그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없애지도, 완전히 지워버리지도 못한 채 파리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목적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원초적 쾌락을 탐하는 행위는 어쩌면 참혹했던 전쟁이 남긴 공허함과 허무함을 애써 지워보려는 일종의 자기방어적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쉽게 싫증을 내고 가볍게 소비해버린다. 그들의 인생에서 사랑, 우정, 상처의 회복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치열하게 ‘쉽게’ 살아버리려는 그들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시린 손을 코트 주머니에 연신 집어넣으며 제이크가 자주 가던 셀렉트 카페를 지나쳐 정처 없이 걸었다. 문득 내가 지금 어디쯤 와있는지 궁금해져 지도 어플을 켰다. 5분 거리에 오르세 미술관이 있었다. 꽁꽁 언 손발을 녹일 겸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네 번째 방문이지만 처음 온 것처럼 설렜다. 입장을 하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 위층에서 미술관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헤밍웨이가 파리의 클로즈리 데 릴라 카페에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한참 써내려 갈 당시만 해도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오르세 미술관이 아닌 오르세 역이었을 그 시절을 상상해보았다. 미술 조각품들이 놓인 자리엔 기차역 플랫폼의 의자가, 전시를 구경하는 방문객들 대신에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는 탑승객들이, 미술관 메인 통로에는 이제 막 출발하려고 준비 중인 기차가 그려졌다. 그리고 거기엔 스페인의 낯선 도시로 새로운 길을 떠나려는 제이크와 빌이 있다.
소설의 제2부 9장의 초반부에선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오르세 역에서 아침 기차를 타는 제이크와 빌의 모습이 그려진다. 소설의 인물들은 자꾸 어디론가 떠나길 열망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파리에 머물고 있는 상태다. 그들 중 파리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로버트 콘은 파리에서 벗어나 남미로 떠나 새로운 모험을 하고 싶어 하고, 조젯은 파리를 좋아하지 않느냐는 제이크의 말에 단호하게 파리를 싫어한다고 답한다. 생활비가 많이 들고 지저분하다는, 뭐 그런 이유로. 브렛은 파리를 ‘이 염병 같은 도시’라고 폄하한다. 그런데 남미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고 설득하는 로버트 콘에게 제이크는 일침을 가한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닌다고 해서 너 자신한테 달아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허를 찌르는 제이크의 대사를 떠올리며 오르세 미술관 한 쪽 벽면에 있는 커다란 시계를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오르세 역이었을 당시 승객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시계일 것이다. 시계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여행의 의미란 무엇인지. 제이크와 그의 일행은 파리에서 팜플로냐로 여행을 떠나지만 그곳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새로운 도시로 떠난다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들은 파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밤새도록 술집을 전전하는 알콜 중독자들이고 이성에게 쉽게 마음을 주고 무분별하게 돈을 소비해버리는, 길 잃은 이들이었다. 소설 중반부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서 인물 간의 갈등 구조가 좀 더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그들이 방황하며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여행이 나의 삶에 엄청나게 대단한 변화를 일으켜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제이크의 말처럼 나는 나일 뿐이고, 내가 어딘가로 떠난다고 해서 나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앞으로 가게 될 ‘장소’가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어딘가를 가면 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 내가 서있는 이곳, 여기에서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가 곧 전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지점에서 비로소 나는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알게 된 후로는 여행지에서 종종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보곤 했다. 내가 앞으로 무슨 성당을 갔다가 어떤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또 어느 공원에 들렀다가 무슨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해야지 따위의 생각들은 접어두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편안히 길을 잃고 돌아다니다 보면 오로지 지금의 나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지금 배가 고픈지, 내 눈앞에 있는 풍경을 보고 지금 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나가는 저 여자의 모자 색깔에 대해 지금 난 어떻게 느끼는지 등에 관심을 기울여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 자신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길이 자연스레 열리곤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여행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오르세 미술관 시계의 분침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폐장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빠트린 것이 없는지 확인한다. 카메라, 여권, 지갑, 핸드폰. 중요한 것들은 다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고흐 관에 가서 그의 초상화를 한 번 더 보기로 한다. 마지막까지 그는 인기가 많다. 그래도 그냥 나가기가 어쩐지 아쉬워 괜스레 기념품 가게를 들려본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하지 못한 소중한 친구를 위해 작은 엽서를 하나 샀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촌스럽게 엽서 같은 건 또 뭐하러 사왔냐고 할 테지만 속으론 무척 좋아할 거라는 걸 안다. 짐 보관함에 맡겨두었던 코트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선다. 눈은 이제 그쳤다. 저녁 공기가 제법 상쾌하다. 가로등에 불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 또 길을 잃어볼 시간이다.
글/사진 곽서희
19세기 영국 소설 전공. 지독한 낭만주의자이자 몽상가다. 한 해에 열 두 번은 여행을 떠나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 F값도 모르면서 카메라로 순간을 기록하며 산다. 인생은 퍽 아름답다고 믿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