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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un 26. 2019

음예예찬陰翳礼讃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혼자서, 교토 #2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방 귀퉁이에 뽀얗게 쌓인 먼지에 시선이 닿았다. 어느새 반납일이 되어버린 미처 읽지 못하고 쌓아둔 책들과 벚꽃과는 상관없이 겨우내 입은 옷들로 가득한 옷걸이. 애써 외면해보지만 이미 그 흔적들은 근심이 되었다.


 늘 머무는 공간에는 일상의 근심이 있다. 지닌 물건에는 새삼스레 사용한 흔적이 보이고 그로 인해 어느 날의 상처가 떠오르기도 한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흔적은 한낮의 햇빛을 피할 길이 없고, 어두운 밤에도 눈부신 형광등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 <다니자키 준이치로¹, 음예예찬²>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에 한창 서구문화가 들어올 무렵인 1930년대, 일본의 전통문화가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일본 미학의 하나인 ‘음예’의 아름다움에 관해 말했다. 음예, 촛불 하나의 어스름한 빛이 만들어내는 어둠에 대한, 시간과 흔적이 겹겹이 쌓인 묵직한 어둠에 대한 예찬.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교토의 골목은 정갈하고 고요하다. 


 여전히 제일 교토다운 골목 중 하나인 기온祇園 하나미코지花見小路에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 멀리 기모노를 곱게 차려 입고 짙은 화장을 한 게이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검은 택시에 올라탄다. 시선을 멈춰 살필 새도 없는 그 찰나에 잠시 에도시대로 돌아간 듯 착각에 빠진다. 일본 전통 가옥인 ‘마치야³’가 줄지어 져 있고 하얀 가로등이 아닌 어스름한 홍등이 길을 밝히고 있는 은밀하고 비밀스런 공간, 그녀는 그렇게 어둡고 깊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하나미코지 골목 끝자락 마치야를 개조한 2층. 이곳에서 사흘간의 낯선 일상을 보내기로 했다. 


 오카미상⁴의 안내로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라 반들반들 잘 닦인 복도에 이르렀다. 세월이 겹겹이 쌓인 복도는 낯선 이를 경계하듯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 소리를 낸다. 몇 호실인지 적혀 있지도 않은 평범한 나무문을 열자 어둠 가운데 갓 벤 건초향이 물씬하다. 실제 방의 크기나 방 안을 채우는 가구의 여부를 단번에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어스름한 천장 빛에 유연하게 몸을 움직일 수 없다. 감각은 깨어 있으나 조심스럽다. 


 방구석에 놓인 사각 등은 거무스름한 빛으로 다다미 방 네 귀퉁이에 그늘을 만들었고, 어느새 아물아물 이는 빛은 눈에 보이는 어둠이 되었다. 



 작은 경대와 선이 얇은 나무로 만들어진 옷걸이는 이 방의 유일한 가구였다. 벽 한쪽에는 족자가 걸려 있고 종이로 직접 만들었다는 사각 등과 천으로 만든 조리, 그리고 방과 현관 사이 유리가 끼워진 중문 장식장에 있던 몇 가지 오브제들이 전부인 작은 공간.


 시간의 감각은 무디고 경대에 비친 얼굴의 윤곽은 흐릿하다. 어딘지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찬찬히 바라봤다. 방에 있는 모든 조명을 켜도 그늘이 만들어낸 공기의 분위기는 낯설고 단순했다. 어딘가에 널브러져 있을 캐리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드러나지 않은 내밀한 공간, 가물가물 흔들리는 그림자 소리와 나무 바닥이 삐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창문 밖 달밤을 즐기는 밤 산책자들의 여유로움에 나를 밀어 넣는다. 


 조용하고 어둑한 교토의 밤이다.


‘결국 금 마키에⁵는 밝은 곳에서 한 번에 퍼뜩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곳에서 여러 부분이 그때그때 조금씩 빛을 드러내는 것을 보도록 만들어진 것이어서, 호화 현란한 모양의 대부분을 어둠에 숨겨 버리는 것이, 말로 할 수 없는 여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저 반짝반짝 빛나는 표면의 광채도, 어두운 곳에 놓고 보면 그것이 등불 끝의 어른거림을 비추고, 조용한 방에도 때때로 바람이 찾아온다고 알려 주어, 어느덧 사람을 명상에 빠지게 한다.’

- <다니자키 준이치로, 음예예찬>




1)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년~1965년. 일본 탐미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극작가.  

2) 음예예찬(陰翳礼讃):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잡지 경제왕래(經濟往來) 1933년 12월호, 1934년 1월호 2회에 걸쳐 연재한 수필로 1939년에 음예예찬(陰翳礼讚)이란 제목으로 간행됨.

3) 마치야(町家): 일본 전통주택 중 하나. 에도시대 중기인 15세기경부터 고밀 도시공간에 폭이 좁은 평면 목조가옥의 발달로 지어져 17세기 이후에는 2층 건물로 입체화 되어 주택인 동시에 상점으로도 사용.

4) 오카미상(おかみさん): 료칸의 여자 주인.

5) 마키에(蒔繪): 옻칠 위에 금이나 은가루를 뿌리고 무늬를 그려 넣은 일본 고유의 칠공예.




글/사진 한수정

우아한 삶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관념과 현실을 분리시킨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혼자 떠나는 여행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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