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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un 18. 2019

London, It's my cup of tea! #2

이곳에 온 것은 드라마 때문이었을까, 홍차를 만나기 위해서였을까.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카페 미야 #16






 유학을 결심하고 고민 끝에 영국행을 선택했던 것은, 이러저러한 현실적인 조건들도 있었지만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 그와 같은 하늘 아래 살아보자는 팔랑팔랑 사춘기 소녀 같은 이유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셜록이 머무는 베이커 스트리트(Baker Street 221B)와 건널목을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유학 생활의 가장 빛나던 순간은 논문도 졸업장도 아닌,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지척의 거리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바라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2013년까지만 해도 드라마 셜록은 고작 6편의 에피소드 밖에 나오지 않아 나는 돌려보고 또 돌려보느라 대사를 외울 지경이었다. 셀 수 없는 명장면들이 있었지만 그중 숨이 멎을 것만 같았던 장면은 바로 셜록과 숙적 모리아티가 대면하던 순간이었다. 시즌 2 에피소드 3편, 모리아티가 구치소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집으로 곧장 들이닥칠 것을 예상한 셜록이 준비한 것은, 바로 홍차였다.


영국 드라마 <셜록> 촬영지


<셜록> 촬영지 바로 건너편, University College London. 내셔널 갤러리를 만든 건축가 윌리엄 윌킨스의 또 다른 작품으로 두 건물이 매우 흡사하다

.

 챙챙 소리 내며 찻잔, 티스푼, 티팟, 티스트레이너를 트레이에 올린다. 부글부글 물이 끓어오르자마자 모리아티가 방문을 열고 들이닥친다. 오가는 이야기는 살벌했지만, 둘은 홍차를 마시며 맵시 있고 우아한 기품은 잃지 않는다. 총부리를 겨눠도 모자란 숙적에게까지도 집주인으로서 손님맞이에 충실하여 홍차를 대접한다니, 도대체 영국 사람에게 홍차란 어떤 의미인가. 차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홍차가 국민 문화로 자리 잡았을까?


드라마 <셜록>의 한 장면




 영국 홍차의 기원은 15세기 후반 대항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유럽에 흘러 들어온 차는 왕족에게 바치는 희귀한 진상품이었다. 차를 마시는 것이 동양 장수의 비결로 여겨졌고, 특히 차를 담는 그릇,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이는 점차 사치품으로 변모되어 차를 마시고, 다기(茶器)를 수집하는 것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차 수입량이 늘어나면서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차 문화는 점차 중산층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지금도 명성이 자자한 트와이닝스(Twinings), 포트넘 앤 메이슨(Fortnum and Mason) 등 차 전문 판매점이 등장하고, '커피 하우스(Coffee House)'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높으신 분들만 마실 수 있던 차를 너도 나도 쉽게 마실 수 있으니, 커피 하우스는 언제나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대화는 계층을 넘고, 문학, 정치, 과학, 상업 등 주제를 넘나들며 열혈 토론장의 중심이 되어 영국의 인문 사회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포트넘 앤 메이슨


 하지만, 수천 개가 넘는 런던의 커피 하우스는 금녀의 공간이었다. 19세기까지도 여성들은 남성의 동행이 없이는 외부에서 식사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영국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100년 전이다.) 허구한 날 커피 하우스에 틀어박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도 미워 죽겠고, 왜 남성은 되고 여성은 안 되나 불만은 하늘을 찔러 청원 운동까지 벌어졌다. 결국 여성에게도 커피 하우스가 개방되기 시작했다. 여성도 눈치 안보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티 룸(Tea Room)이 생겨났으니 차 문화 만큼은 성평등이 일찌감치 이뤄졌다.  


 홍차가 생활 속으로 파고들수록 차와 관련된 비지니스가 속속 등장했다. 동물의 뼛가루를 섞어서 만든 본차이나(Bone China) 도자기를 개발하여 더 이상 중국과 일본의 수입에 기대지 않게 되었다. 또한, 나이, 성별, 계층을 막론하고 누구든 입장할 수 있는 '티 가든(Tea Garden)'이 생겨 홍차 문화는 사교를 넘어 레저의 수준으로까지 이어졌다. 입장료가 노동자의 2-3일치 임금과 맞먹었지만,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나무와 꽃을 벗 삼아 공원을 산책하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들으며, 바쁜 일상 속에서 차 한 잔 하며 잠시 숨통을 트일 수 있는 휴식의 장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홍차 문화가 서민 계층까지 깊숙하게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공교롭게도 술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알코올 중독이 사회적 문제로 크게 부각 되지도 않았고, 삼시세끼 반주와 함께 하느라 늘 술에 취해 있는 것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알코올 중독의 심각성을 인지한 빅토리아 정부는 ‘술 대신 빅토리아 티를!’ 구호 아래 금주 운동을 벌인다. 공장주들은 작업자들을 온종일 뺑뺑이 돌리는 대신, 오후에 차 한 잔 마시면서 잠시 쉬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생산력을 높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외면한 지 오래 아닌가!)


윌리엄 호가스의 작품. 빈민층의 알코올 중독을 풍자했다. (@wikipedia)


 하지만 서민 형편에 집에서 홍차를 마시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본차이나 찻잔 세트를 장만할 만큼 벌이가 넉넉하지는 않은 탓이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다. 흙수저를 쥐고 태어난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피나는 연구를 거듭, 가격도 싸고 품질도 좋은 찻잔 ‘크림 웨어(Cream Ware)’를 선보인다.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 차갑고 뻣뻣한 빵도 홍차와 함께라면 따뜻한 식사를 든든히 챙겨먹은 듯하니 크림 웨어는 서민층의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퀸즈 웨어(Queen’s ware)’라는 이름이 수여되었다. 새하얀 크림색 바탕에 청색의 잎사귀 띠를 두른 크림 웨어는 지금도 앤틱 시장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품목이다.


웨지우드 퀸즈웨어(@amazon.com)


 이렇게 홍차는 계층을 막론하고 영국인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지만, 차를 마시는 시간대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신분의 차이가 존재한다. 오후 4시쯤 버터를 바른 빵과 함께 홍차 한 잔 마시며 출출함을 달래던 애프터눈 티는 점차 상류층의 사교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아름다운 다기를 마련하고, 여기에 곁들일 맛있는 케이크, 비스킷, 샌드위치를 정성스레 준비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격식 없는 파티가 되었다. 애프터눈 티는 집주인의 품격을 판단하는 가치가 되었고, 처음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 친하게 지내자' 하는 권유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역군들이었던 노동자 계층은 종일 공장에 매여 있느라 근사한 애프터눈 티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금주 운동 덕분에 일 끝나면 으레 술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집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 전 식탁에 둘러앉아 가족과 함께 따끈한 차 한 잔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덜어내는 하이 티(High Tea)는 서민 계층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이었다.



 지금은 직장에 매어 다들 산업혁명 시절 공장 노동자와 다름없는 팍팍한 삶을 살고 있지만, 영국인들에게 애프터눈 티에 담긴 '친구와 함께 한 템포 쉬어가기'의 정서는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다니던 옥스포드 대학 연구소의 교수님께서는 일 년에 두 차례 애프터눈 티에 초대해 주셨다. 보통 학교 옆 작은 호텔에서 티타임을 가졌는데, 평소에는 부랑아와 진배없는 차림으로 연구실을 누비던 학생, 연구원들은 이날만큼은 말쑥하게 차려 입고 나왔다. 그간 감춰왔던 빼어난(?) 외모에 서로들 감탄하고, 야외 테라스에 차려진 정갈한 테이블 세팅에 또 한 번 감탄했다. 향긋한 홍차 한 모금, 사르르 녹는 케이크 한 입, 다시 홍차 한 모금, 크림과 딸기잼을 얹은 포슬한 스콘 한 입, 또 다시 홍차 한 모금. 우리는 무한 반복되는 달콤 향긋 쌉쌀함의 향연에 빠져, 그 순간만큼은 공부 스트레스와 삶의 걱정거리를 던져버리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영국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 중에 " It's my cup of tea!"라는 말이 있다. “딱 내 취향이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혹시 숨 가쁜 유럽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영국에서는 근사한 애프터눈 티를 즐기며 나의 취향저격 ‘Cup of tea’를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런던 애프터눈 티 룸 추천


ㅇ 오랑제리(Orangery)

 - 앤 여왕이 사랑했던 티룸으로 현재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켄싱턴 궁안에 있으며 영국 왕실의 애프터눈 티를 경험할 수 있다.


ㅇ 울슬리(Wolseley)

 -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 애프터눈 티가 부담스럽다면 크림티만 주문해도 고급 은식기로 우아한 티타임을 즐길 수 있다. 막 구워 나온 포슬한 스콘이 훌륭하다.


ㅇ 국립초상화미술관 레스토랑 (Portrait Restaurant)

 - 국립초상화미술관 제일 위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트라팔가 광장을 내려다보며 애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다.


ㅇ 포트넘 앤 메이슨 (Fortnum & Mason)

 - 로얄 마크를 받은 역사 깊은 차 전문점으로 포트넘 앤 메이슨 고유의 고급스러운 다기로 준비한 최상질의 홍차를 마실 수 있다.




글/사진 miya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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