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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Sep 10. 2019

파리의 밤

파리의 밤엔 사람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영문학도의 문학 기행 #2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 중 성기에 부상을 당했다.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사랑하는 여자와의 미래도 꿈꿀 수 없게 됐다. 전쟁이 남긴 상처 때문에 육체적 및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 불운한 남자는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속 주인공 제이크다. 신문사 특파원으로 파리에 거주 중인 그는 낮에는 주로 사무실에서 기사를 작성한다. 할일을 끝낸 후엔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 냉철하게 인생의 충고도 해준다.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 커피도 한 잔 하면서 그렇게 그는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러나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그를 지탱해주고 있던 모든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다. 낮 동안 제이크가 애써 외면해왔던 그의 상처는 밤이 되자 잔인하게 고개를 들고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는 사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돌이켜봤을 때 이불을 발로 차고 싶을 정도로 낯부끄러운 이런 실수들은 대개 늦은 밤, 또는 새벽 시간에 저질러진다. 헤어진 전애인에게 자냐고 묻는 시답잖은 문자를 보내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홧김에 고백해버리는 그런 일들. 그리고 거기엔 대체로 약간의 알코올이 곁들여졌을 확률이 높다. 밤이란 게 그렇다. 참 묘한 시간이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들은 낮을 이성과 논리가 통제하고 있는 영역으로, 밤을 감각과 감정이 지배하는 세계로 여기곤 했다. 대표적으로 토마스 하디가 그렇다. 하디는 『테스』에서 어둠과 빛, 낮과 밤의 대비를 통해 이성과 감각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교육과 문명, 그리고 이성과 로고스(logos)를 대변하는 엔젤은 낮 동안엔 매우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밤이 되자 그는 몽유병 증세를 보이며 테스에게 갑작스레 키스를 하는가 하면 수면 상태에서 그녀를 들쳐 안고 강물을 건너가기도 한다. 낮에는 태양(로고스)에 가려져 있었던 무의식적 본능과 감각이 어두운 밤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파리의 밤엔 사람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단순히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파리에서 밤거리를 걷다 보면 도수 높은 샴페인을 한가득 마신 것처럼 문득 몽롱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뭔가 이전과는 다른, 아주 생경한 감각들이 일깨워진다. 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충동적인 행동들이 하고 싶어지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메운다. 암스테르담행 기차에 훌쩍 올라볼까 싶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무 버스나 잡고 타서 종점까지 가볼까 하는 충동도 든다. 낮에 파리 시내를 분주하게 돌아다닐 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밤이 되니 차곡차곡 가슴 한 켠에 쌓인다. 센강 너머로 노란 불빛을 뿜는 에펠탑을 보며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땐 더욱 그렇다. 갑자기 시간도 공간도 흐릿해지고,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감상에 한껏 젖어들게 되고 만다. 파리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미드나잇 인 파리>와 같은 영화가 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영화에서도 파리의 밤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불가능한 일들이 얼마든지 펼쳐질 수 있는 시간으로 나온다. 자정이 되면 생 에티엔 뒤 몽 교회 계단 앞으로 오래된 푸조 자동차가 나타나 주인공을 1920년대 파리로 데려가 준다는 이야기. 상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짜릿하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중


 요즘엔 이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만큼 수많은 이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영화다. 나 역시 그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이다. 영문학도이자 영문학 덕후인 나에겐 의미가 남다른 영화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미국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개봉한 지 벌써 8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지만, 아직까지도 내 기억 속에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 길 펜더가 피츠제럴드의 소개로 한 카페에서 헤밍웨이를 마주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앞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남자가 헤밍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표정이란. 진짜로 심장이 멎는다 해도 그보다 더 놀란 표정은 지을 수 없을 것 같다. 반복해서 볼 때마다 길이 부러워지는 장면이다. 헤밍웨이를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수 만 가지인데.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파리의 밤이 논리적 사고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시간이었다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파리의 밤은 이성 대신 감성이, 낮 동안 억눌려있던 감정들이 그야말로 대폭발하는 시간이다. 제이크의 하루 일과는 대충 이렇다. 아침엔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 앞을 지나 사무실로 기분 좋게 산책하듯 걸어간다. 신문사 기자답게 그는 냉철하고 간결한 문체로 팩트를 기반으로 한 기사를 작성하고 원고를 제출한다. 그 뒤로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반복된다. 친구들을 만나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고 조간신문을 읽고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는 또 다시 기사를 쓰고 샴페인을 마신다. 그는 그렇게 아주 보통의 날들을 보낸다. 그러나 깊은 밤이 되면 그는 사뭇 달라진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는 그는 깊은 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준비하다가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친구에게 냉정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던 그였는데. 낮에는 그토록 침착하고 이성적이던 그가 밤이 되자 사랑하는 여자 브렛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낸다.


 그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브렛과 제이크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둘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간호사와 병사로 만났다. 서로 사랑에 빠졌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지만, 제이크의 부상으로 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둘은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없다. 애써 친구로 지내려고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그 일은 쉽지 않다. 제이크는 수많은 남자들이 브렛에게 호감을 표하고 그 호감에 응하는 브렛을 곁에서 바라만 봐야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친구와 브렛이 단둘이서 밀월여행을 떠나도 그는 이런 상황에 대해 마음속으로만 분노할 뿐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는 순간, 제이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본다. 거울을 통해 그가 마주하게 된 건 그의 벗은 몸만이 아니다. 그는 거울 너머에서 전쟁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상처와 대면하게 된다. 낮 동안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가두어뒀던 그 해묵은 쓰라린 상처와 말이다. 브렛이고 뭐고 다 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제이크의 혼잣말에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여자를 곁에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의 비참한 심정이 담겨있다. 제이크는 자신의 부상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농담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 부상은 전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끔찍했던 전쟁이 남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게 만드는 지독하게 끈질긴 장애물이었다. ‘대낮이라면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감정을 억누르기가 아주 쉬운 법인데 밤에는 정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라는 제이크의 말로 1부의 4장은 끝난다.



 해가 떨어지고 난 뒤 어두운 기운을 한껏 머금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몽마르트로 향했다. 몽마르트에 오면 항상 이 근처 술집을 배회하고 다녔을 헤밍웨이의 모습과 그가 만들어낸 소설 속 주인공들의 혼란스러운 삶의 일면이 눈앞에 그려진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도 종종 등장하곤 하는 몽마르트는 주인공들에겐 일종의 도피의 장소다. 제이크와 브렛을 포함한 그들의 일행은 항상 ‘밤’에 몽마르트를 찾는다. ‘언덕에나 가볼까?’라는 질문엔 ‘몽마르트 언덕에 올라 근처 술집에서 술이나 한 잔 할까’의 의미가 담겨있고, 동시에 복잡한 생각은 이제 제발 좀 집어치우고 싶다는 일말의 소망도 들어있다. 제이크가 브렛과 그녀가 데려온 돈 많은 백작 사이의 관계에 또 다시 질투를 느끼고 괴로워하는 순간에도 제이크는 몽마르트의 젤리 술집으로 간다. 삶의 지지부레한 괴로운 상황들을 알코올의 도움을 받아 잊어보려는 심산은 시대를 불문하고 만국 공통인 듯 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효과는 미미하고 극복하기 힘든 고통은 계속된다.



 멀리서부터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있는 사크레쾨르 성당이 보였다. 옅은 보랏빛을 살짝 띠고 있는 겨울 밤하늘 덕분에 성당은 유난히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몽마르트를 겨울밤에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여름의 몽마르트가 양 갈래 머리를 한 해맑은 말괄량이 소녀라면, 겨울의 몽마르트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근엄한 중년 남성 같다. 여름엔 밤에도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한바탕 축제가 벌어지는 듯한 분위기더니, 겨울엔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방문객도 거의 없다. 음악 소리 대신 서늘한 겨울바람 소리만 들려온다. 몽마르트에 와서 쓸쓸하단 느낌을 받게 되다니. 사람도 사계절을 함께 지내며 겪어봐야 그 사람을 겨우 조금 알 수 있듯, 도시도 그런가 보다. 언덕을 올라가는 푸니쿨라를 타기로 했다. 항상 푸니쿨라를 탑승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곳도 겨울밤엔 조용하다. 한창 성수기인 여름이었다면 팔찌단, 싸인단, 소매치기를 비롯한 각종 사기꾼들이 푸니쿨라 입구에서부터 희생양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성당 앞 계단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묘하게 그 고요함이 좋았다. 사색에 잠기기엔 고요함만큼 좋은 환경도 없다.



 끝없이 밀려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던 몽마르트 뒷골목의 식당들도 거의 문을 닫았다. 여름날엔 새벽까지도 불이 환히 켜져 있곤 했는데. 간혹 영업 중인 식당들엔 손님 대신 가게 주인의 지인들만이 남아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녁은 큰길가로 나가서 해결하기로 했다. 어두운 밤거리를 노랗게 비추는 가로등 불빛을 벗 삼아 경사진 도로를 걸어 내려오는데 택시 한 대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승객 한 명을 태운 택시였다. 저 택시는 이 밤중에 어디로 가는 걸까. 택시를 잡아타고 이동을 하는 저 사람은 이 늦은 밤 어딜 저렇게 가려는 걸까. 연인과 이별한 후 택시 아저씨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묻는 내용의 노래 가사가 문득 떠올랐다. 소설에서 브렛도 새벽에 술에 취한 채 택시를 타고 목적지 없이 빙빙 드라이브나 하자고 말한다. 갈팡질팡하며 제이크를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브렛의 혼란스러운 심경이 택시를 타는 사소한 행동에서도 드러나는 장면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헤밍웨이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사소한 행동, 무의식적인 버릇, 일상적 대화의 중요성을 헤밍웨이는 놓치는 법이 없다.


 택시는 제이크가 브렛을 향한 욕망을 표출하는 공간으로 쓰이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 속에 뒤섞여 정신없이 춤추고 술을 마시던 제이크와 브렛은 바람을 쐴 겸 술집을 나와 택시를 탄다. 택시 안에서 브렛을 바라보는 제이크의 모습을 헤밍웨이는 섬세하고 탁월하게 묘사한다. 브렛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다. 차가 지나가면서 가게에서 비치는 불빛들이 이따금씩 브렛을 비춘다. 불빛으로 인해 브렛의 얼굴은 분명히 보였다가 다시 어두워졌다가, 또 또렷하게 보였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제이크는 그런 브렛을 한참 바라보다가 거리가 다시 ‘어두워졌을 때’ 참지 못하고 브렛에게 키스를 한다. 그는 거리의 불빛을 받아 택시 안이 환해지는 순간이 아닌, 불빛이 사라져 어두워졌을 때에 브렛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고 만다. 낮에 이성적으로 행동하던 그가 늦은 밤 울음을 터트리고 감정을 토로해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장면이다.



 승객을 태운 택시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뒤로 가로등 여덟 개를 더 지나쳐 걸어 내려오니 큰 길이 나타났다. 대로변으로 나오자 고요했던 밤공기는 점차 사라졌다. 부산스러움과 흥겨움이 고요함을 대신했다. 아까와는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기라도 하듯 물랑루즈의 붉은 풍차가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나를 맞이했다. 거리는 늦게까지 문을 연 카페와 식당들로 가득했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가게엔 사람들이 많았다.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는 연인이 레스토랑 창문 너머로 보였다. 홀로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남자도 있었다. 뭔가 대단히 축하할 일이라도 있는지 샴페인을 터트리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보였다. 저마다 각자 다른 도시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나 밤은 똑같이 찾아오지만 세상 어디에도 똑같은 밤은 없다. 누군가는 즐거운 밤을, 누군가는 비참한 밤을, 그리고 누군가는 그럭저럭 괜찮은 밤을 보낸다. 그 모든 밤들이 파리의 밤에, 또는 다른 어떤 도시의 밤에 혼합되어있다. 수많은 도시에서 무수히 많은 밤들을 보냈지만 지금껏 난 파리에서 보낸 밤이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파리의 밤에서 내가 사랑하는 작가의 숨결을 느꼈고, 그가 만들어낸 등장인물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조개 맛이 일품인 봉골레 파스타로 식사를 하고 나니 시계 바늘은 어느덧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센강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 자정 즈음에 숙소에 도착할 것 같았다. 배가 부르니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도 여유롭고 너그러워졌다. 조용히 흔들리는 센 강의 물결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인다. 바람은 차갑지만 춥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게들의 불이 하나 둘 꺼졌다. 나처럼 밤 산책을 즐기는 이들도 간혹 보였다. 음악을 들으며 강을 따라 걷다 보니 눈에 익은 거리가 나타났다. 숙소에 가까워진 것이다.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되려면 몇 분 더 남았다. 괜스레 열두 시에 딱 맞춰 숙소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진다. 천천히, 천천히, 남은 걸음을 세어보며 걷는다. 아직 숙소 문 앞까지 도착하려면 몇 걸음이 더 남았는데 열두 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완벽한 미드나잇 인 파리다.




글/사진 곽서희

19세기 영국 소설 전공. 지독한 낭만주의자이자 몽상가다. 한 해에 열 두 번은 여행을 떠나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 F값도 모르면서 카메라로 순간을 기록하며 산다. 인생은 퍽 아름답다고 믿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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