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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Sep 16. 2019

세상의 극북, 까낙과 시오라팔룩

그린란드 사람들도 살면서 한번 오기 힘든 곳이라는데, 이곳에 다시 오다니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그린란드로부터 #10





 ‘작은 모래 마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오라팔룩의 열댓 개 집들은 작은 모래 해변을 바라보고 있다. 2017년, 겨울과 여름, 이렇게 두 번 방문했던 그린란드의 최북단 마을 까낙Qaanaaq에서 헬기로 20분 정도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4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정착지, 시오라팔룩Siorapaluk이 있다. 이번 여행에는 오래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 예상치 못했던 사람, 그리고 처음 만나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오라팔룩


 누크Nuuk를 출발해 일룰리셋Ilulissat, 우펑나빅Upernavik, 까낙을 거쳐 이틀 후 헬리콥터를 타고 시오라팔룩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탄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는 중간 기착지인 우펑나빅에 들르지 않고 바로 까낙으로 향했다. 우펑나빅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엥닝구악Erninnguaq에게 모처럼 우펑나빅에 들르게 되었다며 공항에서 보자고 말해놓았는데 아쉽게 되었다. 2년 전, 내가 우펑나빅을 방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일룰리셋까지만 방문하고 조금 더 북쪽에 있는 우펑나빅까지는 잘 오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하던 그였는데, 여행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우펑나빅의 날씨 사정에 의해 바로 까낙으로 넘어와 버렸다. 하지만 여행자 입장에서 보면 까낙에 일찍 도착한 건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시 돌아온 까낙


 그린란드 사람들도 살면서 한번 오기 힘든 곳이라는데, 이곳에 다시 오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공항 대합실로 들어서자 다비Davi가 있었다. 먼저 나를 발견하고 “킴~!”이라고 반갑게 부르면서 그린란드식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하는데, 2년 사이에 그렇게 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2년 만에 가는 까낙이기에 아는 사람들에게는 미리 연락을 해둔 상태였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 한스Hans 씨 역시 공항에 나와 있었다. 한스 씨는 까낙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아주 강한 냄새가 나는 치즈를 내게 부탁했다. 공항에서 만날 걸 알고 있었던 터라 가방 가장 바깥쪽에 치즈를 넣어두었다. 바로 꺼내서 주었더니 한스 씨가 지갑을 열려고 했다. “아이고, 아니에요.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우리는 웃음으로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까낙 공항


 그렇게 까낙에 도착하자마자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마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가장 마지막까지 공항에 남아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미리 연락해 둔 민박집 주인아저씨는 다른 손님들부터 집까지 데려다 준 후 마지막으로 우리를 태우러 왔다.


 민박집 역시 2년 전에 머물렀던 같은 집이었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수더분하고 기분 좋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이번에 우리는 고양이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래서 아주머니는 까낙에 올 때 고양이 밥을 조금 사 달라고 부탁했었다. 까낙에는 물자를 실은 배가 1년에 두 번 정박한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고양이 밥까지 실어오는 건 힘든 일인가 보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가능한 만큼 챙겨온 고양이 밥을 꺼내자 이후로 고양이는 나를 볼 때마다 졸졸 따라다니며 내 앞에서 애교를 부렸다.


 이틀 뒤, 최종목적지인 시오라팔룩으로 가는 헬기를 타야 했는데 기상악화로 뜨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일요일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요일에는 모두 쉬기 때문에 헬기가 뜨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침 일찍 공항에 전화를 걸었다. 공항 직원이 오늘은 헬기가 뜰 거라면서 지금 당장 공항으로 오라고 했다. 하지만 데려다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항에서 우리를 데리러 올 수 있는지 물었다. 고맙게도 알겠노라는 답을 들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말고 두 사람이 더 시오라팔룩으로 향했는데, 한 명은 의사 또 한 명은 간호사였다. 헬기를 탄 지 20분, 시오라팔룩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사흘이나 연착되어 도착한 것이다. 오기 힘든 곳에 왔음을 또 한 번 실감했다.


까낙의 풍경



작은 정착지, 시오라팔룩


 시오라팔룩은 그렇게 고립되어 있다는 까낙보다 더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정착지이다. 까낙에는 약 500명의 사람이 살고, 시오라팔룩에는 40여 명이 산다.


작은 정착지, 시오라팔룩


 시오라팔룩 헬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오토바이 하나가 바퀴가 둘 달린 수레를 달고 왔다. 헬기 승객들의 짐을 운반하는 차였다. 오토바이는 시오라팔룩을 떠날 사람들의 짐을 내리고 우리의 짐을 실었다. 그리곤 내처 우리가 지낼 집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헬기장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에게 끼뜰락Qitdlaq 씨의 집이 어딘지 물었다. 내가 렌트한 집의 주인인 끼뜰락 씨는 정작 시오라팔룩에는 살고 있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저 아래에 있는 집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할 뿐,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언덕으로 내려가는 길에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내게 “INSUK”이냐고 물었다. 엇, 그렇다. 이 사람이 바로 나에게 시오라팔룩에 관한 정보를 준 사람이었다. 끼틀락 씨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고, 집 열쇠는 또 이웃 중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도 수소문해 찾았다. 이 작은 정착지에서 집 한 번 찾기도 쉽지 않았다.


시오라팔룩에 도착한 헬기와 짐을 싣는 오토바이


 그렇게 들어간 끼뜰락 씨 집의 내부는 아늑했지만 아뿔싸! 집안에 수도 시설이 없었다. 분명 물이 있는지 끼뜰락 씨에게 물어봤건만! 싱크대는 있는데 수도꼭지가 없었다. 하! 그 말인 즉, 샤워시설이 없다는 이야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갑자기 헬기 연착으로 인해 일정이 줄어든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물을 아예 구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공용 수도가 마을 중심에 있어 사람들이 들통을 가지고 다니면서 물을 집으로 날랐다. 다행스럽게도 전기는 들어왔다. 불안과 안도 사이에서 집 구석구석을 탐방하다가 책장을 발견했다. 책 한 권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한국의 책이었다.


공용수도


 그 책은 문영훈이라는 시인이 쓴 『북극선 이후』였다. 한국에서 출간된 그린란드 책을 모조리 섭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니. 굉장히 놀라운 책이었다. 그린란드, 그것도 이곳 시오라팔룩을 여행한 후 쓴 책이었다. 그것도 10년도 더 전에 말이다. 책이 출간된 것이 딱 10년 전인 2009년이었고, 저자의 여행은 2007년에서 2008년 사이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끼뜰락 씨와 책의 저자가 아는 사이라는 거였다. 끼뜰락 씨가 거의 준 주인공 수준으로 등장했다. 나는 사실 끼뜰락 씨와 전화통화만 했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끼뜰락 씨는 지금까지도 실제로 존재하지만 실체를 본 적은 없는, 마치 책 속의 인물 같은 사람이다. 시오라팔룩의 이 집에는 끼뜰락 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벽에는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있었고, 그가 쓴 듯한 메모 같은 것도 남아있었다.


책에도 등장하는 시오라팔룩의 놀이터


 시간이 날 때마다 『북극선 이후』를 읽었다. 저자는 1987년에 프랑스로 넘어가 오랫동안 활동한 시인으로, 프랑스문화를 전공한 나의 흥미를 끌었다. 프랑스와 그린란드, 이 두 연결고리를 가진 또 다른 한국인을 만나다니! 혼자서 반가워하며 그를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그린란드어는 내가 거주하는 서 그린란드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극북 그린란드만 여행했기 때문에 책 속의 언어는 북 그린란드의 언어였다.


 책 속에는 어린 아기, 간지Kanji의 세례 축하 카페믹Kaffemik에 관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앗, 간지? 문득 헬기장에서 만난 빨간 옷을 입은 아저씨의 아들이 생각났다. 그의 이름이 간지였고 올해 13살이라고 했다.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에 도착한 것 같았다. 내일 간지를 보면 꼭 얘기해줘야지!


문영훈 저, 『북극선 이후』



또 다른 만남


 다음날, 날씨가 너무 좋아 시오라팔룩 해변을 걸었다. 해변에서 마을을 바라보는데 역시 이곳에도 바다를 향해 하얀 십자가를 세운 공동묘지가 보였다. 피오르가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장소였다. 그러다가 그린란드 어가 아닌 말소리가 들렸다. 꼭 일본말 같았다. 여기 시오라팔룩에 오면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는 일본인 할아버지였다. 앗, 그런데 일본어가 들린다는 이야기는 할아버지 말고 또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긴데? 그런 궁금증이 더 해져,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시오라팔룩 해변


 “안녕하세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할아버지는 날 보자마자 단번에 내가 누군지 알아채셨다.


 “아, 김상?”


 오시마 이꾸오 씨는 시오라팔룩에 사는 일본인으로 1972년 북극 원정을 왔다가 이곳에 정착하여 노련한 사냥꾼이 된 사람이다. 내가 시오라팔룩에 가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연락을 취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늘 바다사자와 턱수염물범을 사냥했다면서 해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엄청난 양이었다. 그리고 다른 일본인 남자가 할아버지의 말동무를 하고 있었다. 셋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 일본인 남자가 캐나다의 캘거리 대학교에서 그린란드에 대한 연구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엇, 가만? 일본인, 캐나다, 캘거리 대학교, 그리고 그린란드? 그 퍼즐이 내 머릿속에서 한 데 모아지며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그에게 이름을 물으니 그는 화들짝 돌라며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아느냐고 되물었다.


말린 턱수염바다표범 고기


 사실 나는 그린란드에 오기 전부터 그린란드 문화재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는 그린란드와 관련된 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자연스레 나는 그의 연구 자료를 읽으며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이 한국 사람이 제 이름을 알고 있었어요!”

 “허허, 유명인이네! 유명인!”


 그린란드 최북단 마을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책, 그 책에 나온 등장인물들과의 만남, 그리고 우연으로 맺어진 인연까지. 그린란드가 세상에서 가장 큰 섬이면서 한편으로 좁은 곳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신비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는 그런 땅인 것일까.


 두 사람과 헤어지고 시오라팔룩의 슈퍼에 가니 헬기장에서 오토바이로 짐을 운반해주던 젊은 남자가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다. 투 잡이라니, 멋진걸!


안개가 낀 시오라팔룩



까낙으로의 귀환


 시오라팔룩을 떠나는 날. 까낙으로부터 헬기가 도착해야 이곳을 떠날 수 있다. 까낙 공항에 연락하니 오늘 헬기가 뜨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젠 에어 그린란드의 잦은 연착과 취소가 놀랍지도 않다. 『북극선 이후』의 저자도 항공 지연과 취소를 여러 번 겪었다고 책에 회고했는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며칠 동안 샤워도 못하고 지내려니 슬슬 온몸이 근질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까낙까지 배로 데려다 줄 사람을 찾았고 그렇게 1시간 반 만에 무사히 까낙으로 돌아왔다. 분명 까낙도 최북단의 작은 마을인데, 시오라팔룩과 비교하니 마치 도시 같았다. 이미 마음은 집에 온 듯 편안했다.


 도착한 까낙은 크리스마스 같았다. 올해 첫 물자를 실은 배가 도착한 것이다. 까낙의 슈퍼마켓은 수도인 누크 부럽지 않게 싱싱한 야채를 비롯한 갖은 물건이 빼곡했다.


물자를 실은 배


 1년 전부터 까낙 여행을 계획했던 어떤 한국인 부부는 계속된 항공 지연으로 결국 까낙을 방문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린란드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린란드 내에서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런 일정은 여행자들에게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예상치 못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매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린란드를 찾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런 더 많은 이야기들을 바로 나의 첫 책, 『그린란드에 살고 있습니다』에 담았다. 물론 모든 이야기를 다 담을 순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린란드, 빙하, 기후변화 등 틀에 박힌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는 책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당신이 그린란드 어딘가를 여행할 때, 그곳 책장에서 나의 책을 발견하고 반가워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글/사진 김인숙

세계 최대의 섬인 그린란드에 사는 한국인이다. 그린란드 대학교에서 북서유럽학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밟았다. 각종 매체의 북극 다큐멘터리의 현지 코디네이터로 참여했으며, 현재는 북극의 정책과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린란드에 살고 있습니다』를 썼다.

https://galaxylake.blog.me/





『그린란드에 살고 있습니다』김인숙 저


지도에서 하얗게 칠해져 생명체 하나 없을 것 같은 세계 최대의 섬, 그린란드.

이곳에는 수천 년 전부터 이누이트가 살아왔고, 혹독한 기후 속 그들이 지켜온 언어와 문화가 있다.

세상 곳곳을 여행하다가 그린란드에 정착한 이가 들려주는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세상 끝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그린란드를 '고립된 천국'이라고 부른다. 세상과 동떨어진, 지구에서 가장 큰 얼음 섬. 이곳에서 삶은 전혀 다른 기준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9월 28일 출간. 값 13,000원

책 구매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475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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