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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May 06. 2020

Breezy in April

The Stranger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The Stranger : 나는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8





어깨에 닿는 바람이 꽤 서늘하다. 한동안 한낮엔 29도까지 올라가더니 며칠째 선선한 봄바람이 분다. 창밖을 내다보면 나뭇가지 끝마다 연두색 새순이 맺혀있고, 이름 모를 꽃들이 담장을 넘어 우리 집 울타리에서 바람을 따라 흔들린다. 삶은 꽤나 단순해졌는데 자연은 시절에 맞춰 변해가는 게 신기하다. 


1월 초에는 밤낮으로 한국 뉴스를 보고 매일 가족과 지인들에게 안부를 묻곤 했다. 멀리서 보는 고국의 상황이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어떻게든 마스크를 보내보려고 마스크를 700장쯤 주문해 놓고, 배송을 기다리며 손세정제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한 달쯤 지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가 주문한 마스크는 여전히 도착 전이었고 - 알고 보니 자동으로 취소되어 있었다 - 뉴스에선 미국도 슬슬 위험한 상황을 향해 간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친구들, 선생님들은 나와 함께 한국을 걱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괜찮겠지,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에세이를 써도 바이러스가 소재였고, 발표를 할 때도 그 녀석이 주제로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선 그저 손을 자주 씻고 웬만하면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가 전부였다. 매일 한국 뉴스를 보던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앞에 앉은 친구가 재채기라도 하면 5초쯤 숨을 참고, 수시로 손을 닦고, 알코올이 묻어있는 티슈로 몰래 책상을 닦기도 했다. 아무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에 되도록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봄방학이 시작됐다. 이곳의 봄은 소리 없이 잠시 다녀가는 봄비처럼 그렇게 짧은 여운만 남기고 사라진다. 대부분의 시간이 뜨겁고 덥고 습하기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봄은 누구에게나 신나는 계절이다. 특히 휴스턴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봄방학에 한창 신나 있을 무렵 뉴욕에서 환자가 발생했다. 우리도 생방송이 나오는 채널을 다시 구독하고 매일 저녁 뉴스를 시청했다. 마스크 착용을 권하지 않는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마스크를 구하려고도 했지만, 역시나 구할 수가 없었다. 한국의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족들에겐 이게 장녀의 역할이라는 듯이 조심하라고, 또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개강 날짜가 다가올수록 미국 상황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고 청정지역 같던 휴스턴에도 확진자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이유 모를 공포감에 물건들을 사들였다. 휴지, 물, 그리고 생필품들. 워낙 코스트코에서 휴지, 제독용 물티슈 같은 걸 쟁여 놓는 걸 좋아하던 우리는 안도하면서도 조금 놀랐다. 처음엔 농담처럼 들렸던 ‘휴지 없는 마트’의 풍경이 익숙해졌다. 겁도 없이 마스크도 하지 않고 가던 마트에 가는 것도 꺼려졌다.


이주쯤 지났을까, 답답한 마음에 아침 일찍 자주 가던 마트에 살짝 다녀와야지 하고 나섰는데 살면서 그토록 참담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백색 빛이 투명하게 비추는 물건들, 엉성하게 뒤엉켜 있지만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선반들. 비어있는 정육코너 - 고기가 정말 한 점도 없었다 – 와 유제품 코너, 경계태세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 우리는 구석에 굴러다니는 파스타 하나와 우리가 시즌 내내 즐겨 먹었던 수모(SUMO, 미국산 한라봉), 그리고 아무도 사지 않을 것 같은 예쁜 꽃 한 다발을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운전을 하며 돌아오는 내내 스산한 기분이 몸에 남아 있었다. 원래 변화라는 건 미묘하게 일어나다가 사라지기도 하기 마련인데, 이번 바이러스는 인간들의 삶에 너무 깊숙이 파고들어 사람들의 삶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일이 눈을 뜨고 나니까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카뮈가 쓴 『페스트』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 역시 삼년 전쯤 읽다 만 그 소설을 다시 펼쳤다. 과연 그 끔찍한 일이 어떻게 끝났을지, 그 끝을 알면 왠지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사태의 결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시를 폐쇄함으로써 생긴 가장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는, 사실 그럴 줄을 꿈에도 모르고 당하게 된 돌발적인 이별이었다. 어머니들과 자식들, 애인들, 그들은 며칠 전에 그저 잠시 동안 이별이라고 생각했다. 이 도시의 역의 플랫폼에서 몇 마디 부탁 말을 남기고는 서로 키스를 주고받았으며, 며칠 혹은 몇 주일 후에는 다시 보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었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서 그 작별에 대해 과히 낙심하지도 않고 자기들의 일을 보고 있었던 그들이 대번에 호소할 길도 없이 서로 멀리 떨어져 만나지도 못하고 편지 왕래도 끊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 알베르 카위, 『페스트』 중




방학은 길어졌다. 기약 없이 길어진 방학에 할 게 하나도 없었다. 매주 금요일 만나던 할머니 선생님과의 영어 레슨도 당분간 하지 않게 됐고, 그렇게 가기 싫던 학교도 막상 가지 않으니 심심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하던 필라테스도 관두고, 자주 보던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하는 거라곤 집 안에서 왔다 갔다,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 정주행, 동시에 네다섯 권의 책을 펼쳤다 덮었다 하는 일들 뿐이었다. 이상하게 사고 싶은 게 늘어나 온라인으로 쇼핑을 하고, 먹고 싶은 게 괜스레 많아져 요리도 더 하곤 했다. 규칙이 없는 삶은 처음에는 느슨하고 자유로워 보였으나 그 자유가 나의 삶을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보고 싶으면 보고 그저 일차원적으로 – 동물처럼 – 이 주 정도 살았더니 밤에 잠이 안 오기 시작했다. 기분도 슬슬 안 좋아졌다. 세상이 온통 비관만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아침,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원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있는데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절제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단식을 시작했다. 16시간 공복, 그리고 8시간 식사.


처음 며칠은 조금 괴로웠다. 남편과 저녁식사도 못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고 절제하는 삶이 익숙해지면서 변화가 생겼다. 우선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들이었는데 갇혀있는 지금의 삶에서 속절없이 놓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배고파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이 있는 걸까?


호기심에 시작한 간헐적 단식은 나의 삶에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 주었다. 어쩌면 절제하기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인지도. 삶의 군더더기가 다 사라졌다. 일어나면 물을 마시고 10시에 커피 한잔, 그리고 한국에서 본 적 없는 필라델피아 휘핑크림치즈 - 크림치즈 사이사이에 기포가 있다. 부드럽고 아주 가볍다 - 를 잔뜩 바른 베이글을 먹으며 나무를 본다. 바람도 보고 꽃도 보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줌Zoom을 이용해 온라인 클래스도 듣는다. 출석 체크를 하고 그날의 과제를 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금방 오후 2시가 되어 버린다. 그럼 다시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집안 산책(!)을 하고 이른 저녁을 준비하며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혹은 키스 자랫 아님 브래드 멜다우를 들으며 책을 본다. 해가 질 무렵 남편이 퇴근하면 저녁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함께 집 주변을 4km 정도 뛴다. 뛰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아 이젠, 뛰어야만 한다.




오늘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물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우리가 배우는 건 뭐지?” 모두가 한결같이 “인내심”이라고 답했다. 정말 우리는 모두 인내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수입이 없어 힘든 기업들, 아픈 사람들, 쉴 시간 없이 환자를 보는 사람들. 모든 것이 멈춰있는 것만 같은 이러한 시기에 나 혼자 너무 잘 지내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나는 바람 부는 창가에 앉아 흰 꽃이 살랑거리며 퍼트리는 향을 맡으며 지내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나는 다시, 어제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같은 커피를 다른 색의 잔에 담아 마시며 얼마 전 도착한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시절에 맞게 꽃피고 나뭇잎이 무성해지는 것처럼 지금과 같은 인내의 시간도 속히 지나가길 바라며, 그렇게.


본질적으로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 비록 힘들기는 하지만 그것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것에는 실제로 색다른 묘미가 있다.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것 자체가 거의 스스로를 위한 특정한 목적이 되며, 가까스로 이에 성공하든 아니든 또는 성공한 직후에, 다시 이를 포기하고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에는 무언가 색다른 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상생활의 흐름 속에 중간 휴식이나 막간극으로, 그것도 ‘휴양”이라는 목적으로 끼워 넣는다.

우리가 지루함이라고 명명하는 것, 그것은 사실 생활의 단조로움으로 인해 생겨나는 시간의 병적인 단축이다. 그러한 단조로운 생활의 연속 때문에 커다란 시간 단위는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로 조그맣게 수축되는 것이다. 어느 하루가 똑같은 나날의 연속이라면, 그 모든 나날도 하루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매일이 완전히 똑같은 나날의 연속이라면, 아무리 긴 일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짧은 것으로 느껴지고, 부지불식간에 흘러가 버린 것처럼 될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시간 감각이 잠들어 버리는 것 혹은 적어도 희미해지는 것이다. 청춘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느껴지고, 그 후의 세월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고 속절없이 흘러간다면, 이런 현상도 역시 익숙해지는 것에 기인함에 틀림없다. 다른 생활에 새롭게 적응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시간 감각을 신선하게 하며, 시간 체험을 젊게 하고 강화하고 더디게 하여 그럼으로써 생활 감정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토마스 만, 『마의 산』 중에서





글/사진 별나

클래식 작곡 전공, 빌보드 코리아 기자, 예술 강사를 거쳐 이젠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우아한) 몽상가. 수전 손택을 닮고 싶고, 그보단 소박하게 전 세계를 산책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미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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