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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Dec 13. 2016

홍콩, 케네디 타운 산책

낮술 하면 좋았을 날

 낮술을 마시면 좋을 날이었다. 맑고, 더위도 한풀 꺾이고, 바람이 불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행동에 옮기고 있는지 일요일 오전의 거리는 한산했다. 길쭉한 블록만 나온 말도 안 되는 테트리스 한 판처럼 이 도시를 꽉 채운 빌딩도 꽤 여유로워 보였다. 세월의 겨에 덮여 이거나 저거나 매한가지인 건물들, 텅 빈 골목들, 문을 닫은 상점들, 마작판에 모여든 심심한 사람들, 느긋하게 트램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이층 버스들. 낮술이면 더 좋겠지만, 불분명한 목적으로 케네디 타운을 돌아다니기에도 참 좋은 날이었다.

   
 케네디 타운은 MTR 아일랜드 선(港島綫)의 서쪽 끝에 있는 동명의 역에서 가까웠다. 곳곳에 훌륭한 카페나 베이커리가 많다고 알려진 지역이지만, 낮술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서 그랬는지 그냥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인지, 막상 그런 장소를 발견하진 못했다. 뭐라도 보고 가야 하는데, 조금 안달이 나다가 이내 그런 마음도 사라졌다. 도로를 달리는 이층 버스와 트램은 왜곡된 렌즈를 들이댄 것처럼 세상을 길쭉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종잇장 같은 몸에 팔다리가 긴 그림자들이 건물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일조권이 보장되지 않는 홍콩의 아파트촌에는 항상 응달이 고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몸이 늘어난 사람이 된 것처럼 휘적휘적, 운동량만큼 효율이 나지 않는 걸음으로 걷게 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이 도시가 속도를 늦추라고 권하고 있었다.


 항상 사람이 많고 마땅히 앉아 있을 곳도 없는 빅토리아 하버와 달리, 케네디 타운의 연안엔 벤치까지 마련돼 있었다. 선착장은 비어 있었고, 거대한 화물선은 저 멀리 조각배가 되어 정박해 있었다. 수직의 세상과 수평의 세상의 접점. 한없이 노출되었으나 누구도 관심이 없는 도시의 변두리. 빌딩 숲에서 도망쳐 나온 시민들은 나만큼이나 느리게 주변을 배회했다. 툭하면 인도가 끊기는, 어디선가 보행자의 도시라고는 읽었는데 실제로 과연 그런가 싶은 여기 홍콩의 거리를, 어떤 이는 이를 악물고 뛰어다녔다. 트럭이 몰리는 차고지를 피해 에둘러 에둘러 저만의 조깅 트랙을 돌았다. 그가 지친 것인지 그조차도 낮술이 생각나는 이런 날에 영향을 받았는지 속력은 빠르지 않았다.

 이곳이 도시의 여분이라는 건 차고지를 봐도 알 수 있었다. 버스 차고지는 이래서야 덩치 큰 이층 버스들을 몇 대나 세울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면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매캐한 등유 냄새로 가득한 덤프트럭 주차장은 축구장만큼 넓었다. 현실로 옮겨야 할 건축의 청사진이 아직 많이 남은 것일까. 자재를 싣고 슬금슬금 코를 내미는 트럭은 다음에 홍콩을 방문했을 때 못 보던 건물이 또 하나 늘어나 있을 거라고 예고하는 듯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케네디 타운에서 벗어나 홍콩 대학 쪽으로 방향이 바뀐 모양이었다. 고대하던 카페나 베이커리는 여전히 보이질 않았고, 바다도 건물에 가려졌다. 부동산에서 나왔는지 분양 사무소에서 나왔는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티슈 세 통을 나눠주고 있었다. 주변에 사는 노인들은 운동 삼아 나왔다가 사은품을 받아들고 어느 어두운 건물 입구에 모여앉았다. 티슈 세 통이면 후한 인심이었다. 나라도 줄을 서서 받았을 만한 선물이었다. 저 티슈 상자가 텅텅 빌 때까지 노인들은 건강히 살아남을 것이고, 다른 분양 사무소에선 그다음의 사은 행사를 준비할 것이다. 참 지극한 일상이었다. 판촉물은 역시 번거로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받아갈 만한 무엇이어야 해, 만족스러워하는 노인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여기가 우리 동네인 양 그렇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대로 여길 벗어나긴 아쉽겠다 싶어 서점 한 군데를 찾았다. 골목 안쪽이었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저절로 생긴 공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문 닫힌 셔터를 허망이 바라보다가 로컬 카페가 없다면 세계의 표준이라도 따라야지, 스타벅스에서 시간을 떼웠다. 에어컨 바람으로 차가워진 실내와 거리의 온도 차 때문에 유리창엔 뿌연 김이 서려 있었다. 돌고 돌아 찾은 곳이 여기인가, 이번엔 기어코 허망해질 뻔 했으나 차가운 커피는 어딜 가나 똑같이 차가우니까 그걸로 됐다 싶었다. 막상 되돌아간 서점엔 내가 볼 수 있는 책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 홍콩에 관해 아주 명쾌하게 설명했다며 추천한 어린이 책을 찾았지만 점원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그런 책은 없다고 답했다. 만약 여기에 있는 책을 물었어도 두서없이 꽂힌 서가에서 생각도 해보지 않고 찾아낼 수 있을까. 가끔 우리가 책보다 서점을 더 사랑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면 실제로 그게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서점보단 책을 더 사랑하는(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대체로 걷기만 했고, 딱히 어떤 수확은 없었으며, 그렇다고 낮술을 한 것도 아닌 그냥저냥의 산책을 마치고 센트럴로 향하는 이층 버스에 올랐다. 이 층 맨 앞 명당자리가 남아 있었다. 좌우로 빽빽한 건물 사이로 버스가 달리면 놀이동산에서 좁은 곳을 위협적으로 빠져나가는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옆으로는 트램이 지나갔고, 트램에 탄 사람들은 창밖으로 몸 일부를 내놓은 채 각자 편안한 자세로 늘어져 있었다. 모든 차량이 트램에게 길을 양보하고 있어서 내가 탄 버스 역시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뭉그적거렸다. 그 또한 오늘은 쉬고 싶었다는 듯이. 차고지에 있는 동료들이 부럽다는 듯이. 작은 열쇠 가게 앞에는 노인 두 분이 못에 박힌 듯 앉아 있었고, 다른 이들은 전부 어디론가 바삐 걷고 있었다. 케네디 타운을 벗어나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티슈 세 상자라면 저들도 웃을 수 있을까. 일상은 끝났고 도시는 바빠졌다.





글/사진 베르고트

여행 매거진 브릭스BRICKS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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