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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 매거진 브릭스 Jan 06. 2017

발해-일본 교류의 거점, 후쿠라 항

발해와 일본의 바닷길은 위험의 연속이었다

 1997년 12월, 발해 건국 1300년을 앞두고 네 명의 젊은이들이 뗏목을 건조하여 발해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항로 복원에 나섰다. 뗏목 이름은 ‘발해1300호’. 이들은 옛 발해의 땅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상항로를 따라 바람과 해류에만 의지해서 항해를 시작했다. 혹한 속에서도 24일간의 항해는 성공적인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23일 오후 일본의 오키섬을 눈앞에 두고 뗏목이 난파되었고, 4명의 대원은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다.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통영수산과학관 부지에 ‘침묵의 영웅’이란 기념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4명의 젊은이들이 항해를 시작한 것은 발해 항로를 증명함으로써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 이곳을 왕래하던 발해인의 웅혼한 기상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발해 1300호 대원 추모비




 발해는 건국 이후 당, 일본, 신라 등 주변 국가들과 긴밀한 교류관계를 유지했다. 그 중 일본과는 727년부터 약 200년간 공식적으로 50여 회에 걸쳐 서로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


 두 나라의 교류를 통해 발해는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고, 일본은 대륙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발해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문물 중 최고의 인기 품목은 모피였다.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920년 여름, 발해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에 참석한 시게아키라(重明) 친왕은 당시 가장 비싼 물건이었던 담비 가죽옷을 8벌이나 겹쳐 입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헤이안시대 법령집 ‘엔기시키(延喜式)’에 “담비 가죽은 참의 이상만 착용하도록 한다.”는 기록이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모피에 대한 부자들의 욕구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외에도 일본의 궁중에서 연주하던 궁정악, 달력의 일종인 선명력 등이 발해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특히 선명력은 1년을 365.2446일로 계산한 역법인데, 859년 발해 대사 오효신이 일본에 전해준 이래 1684년까지 무려 823년간 사용되었다.


 발해와 일본 간의 교류는 험한 바닷길을 통해야 한다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주요 출항지는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라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현재 발해시대 성터가 잘 남아있으며, 역사적으로 얽혀있는 한·중·일 고고학자들의 연구열기가 뜨겁다. 이 유적에서는 그동안 다양한 발굴성과가 나왔는데, 가장 중요한 성과는 유구의 최하층까지 발굴하여 발해의 조기 문화층을 밝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이 문화층에서 고구려시대의 시루를 비롯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발해와 고구려 문화의 연속성이 증명되었다. 고구려시대에도 이 지역은 일본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을 것이다.


러시아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출토된 발해 불상


 그러면 크라시키노성에서 일본으로 떠난 발해사신이 도착한 곳은 어디었을까? 발해 사신단은 바람과 해류에 따라 북으로는 데와(出羽)1), 서로는 이즈모(出雲)2)에 이르는 일본 해안 도처에 도착하였는데, 가장 주목되는 곳은 동해를 끼고 블라디보스토크 항과 마주보는 이시카와 현(石川縣) 하쿠이 군(羽咋郡)에 있는 후쿠라(福良)항이다. 『속일본기』에는 “해상에서 조난당한 발해 사절을 후쿠라진에 머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일본삼대실록』에는, “발해사절이 돌아가기 위한 배를 만들 때 후쿠라도마리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즉 후쿠라는 일본에서 발해로 가는 출항지이면서, 발해로 건너갈 배를 건조하던 조선소가 있던 곳이었다.


후쿠라 항을 알리는 비석




 대한항공에서 인천-고마쓰 간 직항을 운항하고 있지만, 후쿠라까지는 공항에서 열차나 버스로 3시간 정도는 더 걸리기 때문에 찾아가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인근 가나자와 시는 오래된 거리와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로 일본 내에서 작은 교토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니 만큼 한 번쯤 마음을 내 봐도 좋을 곳이다. 후쿠라 항은 서북쪽으로 열린 크고 작은 2개의 만으로 이루어져 태풍을 피할 수 있는 항구이기 때문에 동해항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역할은 고대는 물론 중세·근세까지도 이어졌다. 아직도 남아있는 후쿠라 등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로 유명하며 이시카와 현 지정문화재이기도하다.


후쿠라 등대


 발해와 일본의 바닷길은 위험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해로에서 비극을 맞았는데 그 중 한사람이 발해의 승려 인정(仁貞)이다.


 인정스님은 제17회 견일본사 녹사(錄事)라는 지위로 일본을 방문했다. 녹사란 사절단의 대사(大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다음에 오는 높은 직위이다. 당시 일류 지성인이었던 승려들은 한문 서적에 통달했으며 고금 사례에도 정통했기 때문에 고대 국가에서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왕효렴(王孝廉)이 대사로 참여한 사절단의 간부로 일본의 수도에 입경한 인정은 정월 하례식에 참석하여 벼슬을 받기도 했다.


 815년 정월 22일, 이 사절단은 일본왕의 국서를 받아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사절단을 태운 배는 도중에 강한 바람을 만나 대파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며, 다시 배를 건조하는 사이 인정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인정이 사망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문화수려집’에 있는 사카우에이마오(坂上今雄)의 시로 볼 때 816년 가을까지는 생존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秋風聴鴈、寄渤海入朝高判官釋錄事 一首        坂上今雄 

大海途難渉  孤舟未得廻 
不如關隴雁  春去復秋來 
  
추풍 속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발해 판관 고영선과 녹사 인정에게 바치는 시 한 수 - 사카우에이마오 

대해(동해)를 횡단하는 바닷길은 좀처럼 건너기 어려운 까닭에 한 척의 배는 아직 귀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중(關中) 농서(隴西)지방의 기러기들이 하늘로 쉽게 대해를 넘어 봄에 가서 가을에 돌아오는 것과 같을 수는 없나 봅니다.


후쿠라 항 전경


 이들의 죽음은 이들과 가깝게 지낸 일본 문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제17회 견일본사가 다시 귀국길에 오를 때 일본왕은
 발해왕에게 전하는 국서에 왕효렴과 인정 등의 사망과 그 사정을 언급하고, ‘심이창연(甚以愴然)(이 일을 몹시도 마음속 깊이 애처롭게 생각합니다.)’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일본왕의 칙명으로 편찬된 한시집 ‘문화수려집’에 외국인의 시가 실린 경우는 왕효렴과 인정뿐이다. 이는 그들의 시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본 문인들의 마음이 각별했기 때문은 아닐까?




편집자 주 1) 현재의 야마가타 현과 아키타 현에 해당한다.
편집자 주 2) 현재의 돗토리 현(鳥取縣) 동부 지역.



글/사진 임석규

일본 무시시노미술대학에서 발해문화, 발해-일본 간 문화교류를 연구하였으며 현재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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