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생물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
(도레보보봉)
*본 글은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20)의 내용을 일부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대학생 때 창가에 비친 조경을 보고 감탄하시는 교수님이 계셨다. 적지 않은 연세에도 교수님은 눈이 좋으셨는지 창가에 꽃이 눈에 띄면 그 꽃에 대한 이야기로 수업 시간을 채웠다. 심지어 교수님은 학교에서 먼 산에 있는 이름 모를 한 송이 꽃을 학생들에게 친히 보여주기 위해, 갑자기 현장학습 수업을 계획하기도 하셨다. 자연보다는 도심을 좋아하고 꽃에 무관심한 학생이었던 나는 그 교수님이 이해가 안 갔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 나는 그 교수님의 마음을 약간 이해할 거 같다. 최근에 직접 울창한 나무들과 각종 다양한 꽃들을 보고 새소리를 들었는데, 내겐 정말 신기했었다. 유튜브에서만 들었던 숲 ASMR이 실 사운드로 아침마다 들리고, 고라니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다니! 솔직히 내가 표현력 좋은 작가면 이 광경을 보고 시라도 한편 쓸 수 있을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산속에 있는 꽃 한 송이와 나라는 인간 한 명의 가치를 비교한다면 어떨까?
우선 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봄철만 되면 벚꽃 보러 가는 커플들은 많고, 예쁜데 이름을 모르는 꽃을 찍으면 그 꽃의 이름을 알려주는 어플도 있을 정도로, 우리는 꽃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왜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데, 꽃이 뿌리내린 자연은 황폐해졌다는 소리가 나올까? 이에 답하기 전, 꽃과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 조금 더 극단적인 질문이지만, 꽃 한 송이와 인간 한 명의 목숨 둘 중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답은 꽃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꽃이 인간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고? 그야 당연히 인간은 동식물과 다르게 언어를 쓸 줄 알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줄 아는 존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그걸 통해서 찬란한 문명을 발전시켜 지금까지 생존한 주요 생명체가 된 셈이다. 근데 그 ‘이성’이라는 게, 인간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것인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COSMOS: Possible Worlds)에서 앤 드루얀(Ann Druyan)은 숲속에 대화가 이뤄진다고 말한다. 그가 언급한 숲속에 대화는 나무들과 꽃이 서로 살아가기 위한 소통이다. 꽃과 가장 밀접한 벌들도 언어를 쓰는데, 그들만의 춤언어로 벌집 밖의 상황을 서로 공유한다. 이 춤언어도 복잡하고 다양하며, 벌들은 춤언어를 통해 체계를 이뤄 생존하고 아울러 꽃과 함께 공존한다. 이런 특징들을 생존하려는 동식물의 본능이라고 치부하겠지만, 사실 인간의 이성도 생존하기 위한 본능이다. 드루얀은 옛날 우리 선조들도 먼 미래의 환경 실패를 예상하지 못한 채, 근시안적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농사를 짓고 문명을 세우고 기계와 화학물질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먹고 살려고, 좀 더 편하게 삶을 살아가려고, 갖가지 머리를 굴린 게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그 문명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해 생겨나고 발전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꽃과 벌처럼 인간의 ‘이성’도 살아가기 위한 도구다. 그리고 인간에게 꽃은 그저 예쁜 식물이지만, 벌의 시선(자외선 촬영)으로 본 꽃은 꽃봉오리가 빛을 품은 채 잎과 줄기가 이어져 질서를 이루는 소우주다.
그렇다면 지구에게 꽃 한 송이와 인간 한 명의 가치는 똑같을까? 이 질문을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도레보보봉)
여기 쓰레기 없는 장을 만들어 보겠다는 모임이 있다. 코로나로 장(場)을 열수 없어 지금까지 실패를 쌓고 있는 모임 ‘쓰장’을 만나보았다.
각: ‘쓰장’은 무엇이고, 어떤 모임이신가요?
중호: 자취생활을 하며 넘쳐나는 쓰레기를 보며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장을 보고 음식은 사라지는데, 쓰레기만 남더라고요. 씁쓸한 마음에 쓰레기 없는 시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쓰레기 없는 장터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었어요.
희원: 쓰장은 쓰레기 없는 장보기죠. 제가 2019년에 새 활용 플라자에서 새 활용 극장을 작업했어요. 자연스럽게 환경에 관심이 생기면서 프로젝트 같은 것들을 진행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미지: 앞으로 계속 쓰레기랑 덜 마주하고 싶어서요. 쓰레기 없는 것이 삶의 지향이 되길 바라는 쓰레기 없는 장입니다.
각: 바다의 날 처음으로 ‘쓰장’ 행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행사를 기획하셨나요?
중호: 바다는 쓰레기가 모이는 큰 종점 중에 하나에요. 쓰레기를 줄이는 일은 바다를 위한 일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쓰장의 첫 행사로 바다의 날을 기획했어요.
희원: 환경과 관련된 날에 맞춰 행사를 준비했는데요, 마침 5월에 바다의 날이 있었어요.
각: 바다의 날 행사는 어떤 행사였나요?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희원: 하…
중호: 코로나 미워…
미지: 두 분은 정말 힘이 빠지실 거에요. 제가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 (웃음) 쓰장은 쓰레기 없는 장(場)을 만드는 모임이에요. 하지만 코로나로 모이는 장을 만드는 게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래서 ‘바다의 날이 있다’는 것을 주변사람들에게 알릴 정도의 행사로, 바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일종의 캠페인(?)을 만든 거죠. 먼저는 바다의 날을 기념해서 ‘쓰장’만의 슬로건을 만들었어요. ‘내가 바라는 바당’이었는데요, 바당은 제주도 말로 바다이기도 하고, 말 그대로 바다에 대한 바람을 담고 싶었어요. 우리가 바라는 바다가 쓰레기 섬으로 이뤄진 바다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몇 가지의 행사를 기획했어요. 쓰레기 줍기, 플라스틱 없는 하루 도전, 바다와 관련된 책이나 기사 읽기, 바다 사진이나 글 공유하기, 멸종위기의 바다생물 색칠하기 등이었죠. 작게라도 같이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중간에 이태원발 코로나 확산으로 이조차도 모이는 장을 전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바꿨어요. 온라인에서 개별적으로 쓰장의 행사에 참여해주시면, 선물을 보내드렸어요. 사실 누가 얼마나 참여해주실까 망연자실 하기도 했는데요, 저희의 예상보다는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셔서 감사했죠.
각: ‘내가 바라는 바당’이라는 슬로건이 재미있어요. 내가 바라는 바다는 무엇인가요?
중호: 어릴 적에 돌고래들이 헤엄치는 걸 보았어요. 그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거든요. 어릴 적 봤던 그 장면을 다시 보는 게 제가 바라는 바다에요.
희원: 바다의 날을 준비하면서, 멸종위기의 바다 생명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제가 바라는 바다는 바다 생물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인 것 같아요.
미지: 바다. 저는 바다와의 추억이 많지 않아요. 제가 바라는 바다는 앞으로 제가 바다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씩 추억을 만들어가는 것이에요.
각: 쓰장의 행보에서 변수이자 실패(?)요인은 코로나 인 것 같아요. 쓰장에게 실패요인이었던 코로나는 어떤 느낌인가요?
중호: 코로나를 통해 환경과 사람이 얼마나 연결되어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코로나가 어디서 출현한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박쥐든 밍크든 진짜 거리를 두어야 했던 동물과의 거리 두기에 실패하고, 결국 사람들끼리 거리를 두게 되었어요. 결국 코로나는 환경과 지구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시간이었어요.
희원: 쓰장을 준비하면서 일회용품을 줄이자는 생각을 했는데요, 코로나19로 일회용품과 생활이 밀접하게 관계된걸 느꼈어요. 무조건 일회용품을 쓰지 말자 같은 일차원적인 대책보단 새롭고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코로나로 확장성을 가지게 되었어요.
미지: 코로나로 개인적인 활동이 많아진 것 같아요. 모이지 않고도 일상에서 쉽고 가볍게 소비해볼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게 된 것 같아요.
각: 앞으로의 쓰장은?
중호: 제로웨이스트 마켓이 많이 없어서 정말 아쉬웠어요. 전체적인 소비패턴을 바꾸는 것이 쓰장의 목표입니다.
희원: 사람들이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환경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희도 생각하고 고민하고 발전하는 모임이 되면 더 좋겠죠!
미지: 앞으로도 지금처럼 쓰레기 없는 장을 위해 소소한 도전기가 계속되면 좋겠어요.
(한봄일춘)
“띵동 띵동~”
현관문 초인종 벨소리에 평상시와 다르게 아들 녀석이 호들갑이다.
“왔다! 엄마, 자장면! 엄마~~~”
아내는 아들의 성화에 벌써 현관문 앞이다. 아내가 값을 치르는 동안 자장면, 짬뽕, 탕수육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가 순식간에 식탁으로 옮겨졌다. 아들 녀석은 오래간만에 먹을 자장면 생각에 일각이 여삼추다. 자장면 용기를 덮고 있는 랩을 휘뚜루 벗기고 내게 젓가락을 내민다. 나보고 비벼달라는 얘기다. ‘그렇게 자장면이 좋을까?’ 자장면을 맛깔스럽게 비벼 건네니 아귀아귀 먹기 시작한다. 아들은 자장면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워내고 내 짬뽕을 탐낸다. 갑자기 짬뽕 국물이 당긴다나 뭐래나. 아들내미 덕분에 일소 一笑하며 다섯 식구는 저녁을 맛있게 해치웠다.
저녁식사 후, 나는 설거지 담당을 자처했다. 식사가 담겨있던 플라스틱 용기를 물에 휙휙 헹거 재활용 통에 집어넣으면 끝이니 안 할 이유가 없다. 설거지는 3분이 채 안 걸렸다. ‘얼마나 간편한 세상인지’ 설거지까지 마치니 저녁시간이 여유롭다. 아내가 타 준 아이스커피 한잔을 들고 내 방에 들어와 소화도 시킬 겸 TV를 켰다. 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다.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배달시켜 먹거나 포장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플라스틱 쓰레기도 다시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버려진 플라스틱은 재활용도 잘 안 되고 그대로 바다로 흘러갑니다.”
뉴스 앵커의 차분한 목소리에 반해 뜨악한 내용이 이어졌다. 코로나 19로 인한 일상에서의 과다한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사례가 송출됐다. 재활용되지 않은 플라스틱이 그대로 방치된 해안가와 해수욕장의 장면도 연이어 이어진다. 모래사장에 해안선처럼 보이는 긴 줄은 자세히 보니 줄느런히 쌓여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다. 플라스틱 쓰레기의 재활용률이 절반 수준에 그치니 재활용되지 않은 플라스틱이 방치되어 바다로 유입된 것이다.
세계에서 해마다 최대 1,40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2050년에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수가 바닷속 물고기 수보다 더 많을 것이란 경고까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수산물과 어류의 경우, 먹이활동을 통해서 체내로 미세 플라스틱이 들어가게 되고 대부분 플라스틱이 검출되고 있단다. 결국 이 쓰레기들이 우리 밥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구조다.
국내 배출 쓰레기 중 7~80%를 플라스틱이 차지한다고 한다. 쓰레기 문제는 곧 플라스틱 처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때 ‘신의 선물’로 주목받던 플라스틱은 이제 ‘신의 저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 생태계를 위협하는 애물단지가 됐다.
플라스틱 쓰레기 폐해와 관련된 보도 및 정보는 이미 넘쳐난다. 이런 정보를 접할 때마다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쓰레기 배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데 도대체 저 많은 쓰레기들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분리수거 의무화와 더불어 플라스틱 재활용품을 별도로 배출하고 있는데 이상할 따름이다. 나는 다른 집보다 양을 좀 줄여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다고 나름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이런 위안이 무참히 무너지는 거 같아 속상하다.
매주 목요일은 우리 아파트 단지 재활용품 배출 날이다. 한주 동안 재활용품을 줄이고 줄여도 2박스 정도 나온다. 내용물보다 포장이 몇 배나 더 큰 대한민국에 살다 보니 별 수 없다. 우리나라가 2015년 기준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소비량이 세계 3위라고 하니 가히 플라스틱 천국이라 하겠다.
우리 집에서 배출되는 플라스틱 재활용품은 시티로 폼, 비닐봉지, 요구르트 병, 플라스틱 과일박스, 각종 플라스틱 용기, 플라스틱 우유병, 청량음료 병 등등 매주 대동소이하다. 다른 집도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집보다 조금 더 배출하고 있다는 느낌 말고는. 그렇게 하루 종일 분리수거된 재활용품은 다음날이면 말끔히 사라진다.
산처럼 쌓였던 재활용품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개운한 맛이 있다. 하지만 저런 방송이나 기사 내용을 접하면 도리어 불안감이 좀 더 확실해진다. 이 아파트 숲에서 배출된 엄청난 쓰레기를 받아들일 땅이 더 이상 없을 것만 같다. 게다가 이 배출된 쓰레기가 우리 아파트보다도 높게 쌓일 것만 같다는 염려가 날이 갈수록 커진다. 환경부 전수조사 결과, 전국의 쓰레기 산이 235곳에 달한다고 하니 이러한 나의 우려가 이미 현실이 되고 말았다. 내 눈 앞에서 멀어졌던 플라스틱 쓰레기가 부메랑이 되어 재앙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거주불능으로 인해 22세기에는 아들내미가 그토록 좋아하는 자장면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난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했던가? ‘내 탓이요!’하는 자기 위안적인 구호 말고 구체적인 실천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저 눈감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미래는 플라스틱 쓰레기 분리수거에 있다고 해도 더 이상 과언이 아니다.
직접 바닷속에 들어가 쓰레기를 치우는 활동을 하고 있는 한 스쿠버다이버 부부의 말이 유독 귓가에 윙윙거리는 요즘이다.
“최소한 우리가 지나온 길은 바뀌잖아요!”
여름이 왔다. 좋은 점은 차치하고 마르지 않는 빨래, 함께 올라가는 불쾌지수와 장마로 인한 외부활동 제약 등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무엇보다도 나의 큰 관심사는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늘어가는 개체수의 그 분들... 우리집 어둠속에서 샤샤샥, 때론 밝아도 샤샤샥 돌아다니는 바로 그 분들이다. 초 여름 경 새벽에 일어났다가 눈이 마주친 이후로는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녀석들을 어떻게 쫓아낼까. 나는 힘이 없으니 약의 힘을 빌린다. 샤샤샥은 자연, 약은 화학. 자연이 싫어하는 화학제품을 사용하자. 하수구 청소용품을 사자. *팡에서 핫딜을 클릭한다. 배달이 온다. 뚜껑을 연다. 냄새가 독할수록 좋다. 나조차도 역해야지 샤샤샥도 못견딜테다. 0.2 리터를 하수구에 따른다. 30분 그대로 둔다. 벌레가 안보인다. 이대로 좋다.
전 세계적 코로나 국면을 맞이하며 인간의 활동이 자제된 후 지구가 제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종종 나온다. 인간에게 불편한 무언가가 자연에게는 본연으로 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니 그동안 인간들, 자기들이 살겠다고 무슨짓을 해 왔나. 역시 인간의 존재는 지구에 민폐임이 틀림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명에 익숙해진 인간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숨쉬는 동안은 아주 꾸준하고 자연스럽게 자연을 훼손하고야 말 것이다. 기생충은 벌레의 이름이 아니다. (핏자)
(안단테)
제가 어머니께 받은 가르침 중 일상에서도 기억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닌 나무와 바람과 꽃과 동물이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키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렵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 있어 우선 순위는 ‘인간’ 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행동으로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이 아닌 지금의 인간만 살아가는 삶을 만들었습니다. 남극의 빙하는 해마다 녹아 지구의 온도가 1도씩 상승하고 흑동고래는 기후변화로 먹이인 크릴 새우를 찾으러 8천 km를 헤엄쳐 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들은 대기 오염으로 인해 마스크 생활이 익숙해져 가고 있고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흙 만지며 놀던 아이들은 찾아 보기가 하늘의 별만큼 이나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말 뻔하디 뻔하고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생각’ 하지 않고 ‘실천’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살기에는 우리가 불편함과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실제로 급격한 환경 변화로 ‘제로 웨이스트’ , ‘플라스틱 제로’ 와 같은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을 들으면 뭔가 나도 변화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이제와 나 하나 변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플라스틱 제품이 이렇게 넘치는데 어떻게 안 쓸 수 있지? 화학 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대체품을 찾아가는 불편함을 왜 내가 해야 하는 거지? 라는 현실적은 단면만 보면 저도 귀찮고 불편합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함께 살아가는 삶을 위해 화학 제품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플라스틱 배달 용기와 일회용 수저들을 거부하시는 것을 보며 큰 것부터 변화할 생각이 아닌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을 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실천은 저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이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일회용 수저 대신 수저통을 들고 다니면 되는 것이고, 설거지 세제 대신 소프넛 열매를 사용하면 되는 것이고, 비닐 봉지 대신 에코 주머니와 백을 들고 다니면 됩니다. 이렇게 뻔한 소리 또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뻔한 소리 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실천하려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 아닐까요.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정말 이 지구에 인간만이 존재한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물도, 바람도, 나무도 없는 세상에서 인간만 살 수 있다는 생각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을 겁니다. 환경 파괴에 있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가해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인간에게 이웃으로 무언갈 계속 내줍니다. 목 마를 때 물을 주고, 더울 때 선선한 바람을 주고, 민들레 씨는 바람에 날려 인간들 삶에 녹아 들어 예쁜 꽃을 피워줍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의 발전으로 할 수 있을까요? 못 할겁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가 어떻게 인간 보다 소중하냐고요. 예전의 저는 이런 물음에 답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인간이 더 소중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같은 생명으로 태어나 감히 어떻게 서로를 비교할 수 있냐고요.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인간’만 생각하며 살아가도 괜찮은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환경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다른 생명을 환경으로 보는 관점에서 나온 언어이고, 생태는 인간 역시 이 세계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는 언어라고 한다. 주제를 잡고, 주제를 공지하고, 그 뜻을 찾아보다 알게 되었다. 환경보다는 포괄적이고 수평적인 생태를 썼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지만 여기까지가 나의 깊이다. 허세는 무지하게 있어서, 멋있어 보이는 것을 쫓고 싶은데, 무지하다. 그렇게 환경실패는 주제의 언어부터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하기 위해 존재하는 월간지가 실패월간이 아니겠는가. 고칠 것이 많이 남아있는 나의 이 얕음 칭찬한다. 배움의 동력이며, 아직도 가능성이 많아 RPG 매우 가능하다. #오늘의_정신승리 (한강각)
실패월간 10호 끝.
크고 작은 실패를 응원하는 실패 각성 잡지 실패월간.
by 도시비둘기
문의 : fffail09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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