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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라는 독특한 콘셉트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엔하이픈(ENHYPEN)이 지난 5월 22일, 10개월 만에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번 앨범 ‘다크 블러드(DARK BLOOD)’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뱀파이어와 한 명밖에 사랑할 수 없는 늑대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 ‘다크 문(DARK MOON): 달의 제단’ 웹툰과 같은 서사를 공유한다. 기존에 발매한 앨범들에 이어 ‘뱀파이어’ 콘셉트를 계속해 이어나가는 모습이다.
엔하이픈의 소속사 빌리프랩은 이번 앨범을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는 진짜 ‘나’의 이야기로, 동 세대에게 ‘먼저 앞으로 나아갈 테니 함께 가자’라고 선언하는 이야기”라고 소개하며 다시 한번 엔하이픈을 대표하는 키워드, ‘연결’과 ‘운명’을 강조했다.
앨범이 발매되기 앞서, 엔하이픈은 5월 1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다크 블러드의 콘셉트 트레일러를 공개했다. 영상은 한 소녀가 차 안에 갇힌 채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성훈이 소녀를 지키기 위해 멤버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결국 제압당하자, 소녀는 제이의 목을 문다. 이에 성훈을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쓰러지자 소녀와 성훈은 몸을 피하기 위해 장소를 옮기고, 성훈이 이번 앨범을 관통하는 문장이자 타이틀곡 제목인 ‘Bite Me’를 언급한다. 소녀는 성훈의 목을 물고, 성훈은 재가 되어 사라진다.
운명의 상대와 하나로 연결되기 위해 희생을 마다치 않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콘셉트 트레일러는 엔하이픈이 이번 앨범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잘 드러낸다. 팬데믹 이후 다시 만난 팬덤 ‘엔진(ENGENE)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각각 ‘뱀파이어(엔하이픈)’와 ‘인간(소녀)’으로 서로 다른 존재인 ‘우리’가 각자의 경계를 뛰어넘어 연결되는 과정을 그려내어 보는 이들에게 노력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선사한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던 ‘경계인’에서, 자신의 운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년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는 모습은 엔하이픈이 지금껏 발매한 앨범들을 통해 전하고자 한 중요한 메시지이자 엔하이픈이라는 그룹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너는 나의 어둠을 거둬버린 태양
그 빛에 타버린다 해도
언제까지나 널 기다릴 것이다”
다크 블러드의 첫 번째 트랙 ‘Fate’는 콘셉트 트레일러의 내용을 한 곡 안에 축약한 듯한 느낌을 준다. 가사를 읽다 보면, 콘셉트 트레일러 앞부분에 내레이션으로 언급되었던 문장 중 하나인 “This is a story about Pride and Oblivion, Love and Sacrifice and Fate(이건 오만과 망각, 사랑과 희생, 그리고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의 키워드가 전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망각, 그 지독한 저주가 어디에서 왔는지”, “운명은 다시 내 손에 쥐어졌다”, “피로 매듭지은 사랑은 오만에 지워져”, “나를 너에게 바치기 위해”. 굳이 콘셉트 트레일러를 시청하지 않아도 이번 앨범의 주제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레이션과 노래의 적절한 혼합으로 어떠한 곡을 듣는다기보다 오디오북을 청취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Fate’는 앨범의 전체적인 긴장감을 높이고, 청취자들로부터 하여금 이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기대하게끔 만든다.
이번 앨범의 두 번째 곡이자 타이틀곡, “Bite Me”. “Bite Me”의 뮤직비디오는 멤버 전원이 뱀파이어를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인 ‘목재 관’에 담기며 시작된다. 이어서 ‘혈관’, ‘blood’ 등의 단어들이 등장하며 엔하이픈을 대표하는 뱀파이어 콘셉트를 강조한다.
이번 타이틀곡은 기존의 타이틀곡들과 다르게, 청자에게 무언가를 계속해 요구하는 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게로 다시 와 tie me”, “날 구원할 거라면 Just come kiss me and bite me”, “남겨줘 on my neck 네 거란 증거”와 같은 가사는 데뷔 앨범 타이틀곡 ‘Given-Taken’의 “난 너에게 걸어가지”, 그 이후 발매된 ‘Tamed-Dashed’의 “내 손을 잡고 달려봐”, ‘Blessed-Cursed’의 “몰라 정답 따윈, 내 방식대로 가지”와 비교했을 때 매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로 연결되기 위해선 한쪽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걸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서로가 서로를 원하고, 하나로 연결되길 희망하는 가사는 이번 앨범의 주제가 무엇인지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여섯 번째 트랙이자 이번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는 ‘Karma’. ‘운명을 뭐라고들 부르건 I don’t give a what’, ‘개연성을 넘어서’. 언뜻 들으면 엔하이픈이 데뷔 초부터 계속해 강조해오던 ‘운명’을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인 듯하지만, 아니다. 이들은 ‘운명’이라는 단어의 고정관념, 틀에 갇혀 상대와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운명이라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미 정해진 관념만 따르다 보면 진정한 운명과 조우해도 헷갈릴 뿐이다. 그래서 엔하이픈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그 어떤 개연성도, 설명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뒤로하자, 엔하이픈은 상대를 처음 만난 그 순간, 직감적으로 익숙함을 넘어 서로 얽혀져 묶인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비로소 운명의 상대와 연결된 것이다. 엔하이픈이 이번 앨범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엔하이픈은 ‘너와 나는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운명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며 이번 앨범을 끝마친다. 비록 운명의 상대와 연결되기까지의 과정 중엔 오만과 저주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과 직면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은 하나가 되었으니 완벽한 결말 아닌가.
‘DARK BLOOD’는 모든 곡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승전결 모두가 탄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엔하이픈의 메시지를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앨범 수록곡들을 순서대로 청취해 보길 권장한다.
이번 앨범에서 소년은 드디어 운명과 하나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엔하이픈은 어떤 방향으로 그 다음 발자국을 내딛게 될까? 엔하이픈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며 이번 글을 마친다.
* 본 글은 아이돌레 웹진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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