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뮤즈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책 한 권을 읽지 않는, 독서보다는 미디어 시청이 익숙해진 현대사회에 별안간 ‘텍스트힙’이라는 바람이 불어왔다. 텍스트힙이란, ‘텍스트’와 ‘힙하다’를 합성한 신조어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행위를 힙하다고 여기는 MZ세대 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이와 더불어 ‘독파민’이라는 단어도 함께 등장했는데, 이는 숏폼 콘텐츠와 OTT 등으로 인한 ‘도파민중독’에서 벗어나 독서를 통해 도파민을 충족하려는 문화에서 파생된 말이다.
올해 초부터 조금씩 몸집을 키워오던 독서 붐과 텍스트힙 문화는 지난 10월 스웨덴 한림원이 한강 작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함과 동시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밀리의 서재(온라인 독서 플랫폼)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는 지난해 1월 67만 명이었던 데와 비교해 올해 1월 89만 명으로 증가했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전해진 10월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며 출판, 유통 업계는 기나긴 가뭄 끝에 단비를 맞게 되었다.
독서가 그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한 페이지를 찍어 SNS에 업로드하거나, 필사 브이로그를 제작하는 등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텍스트힙을 실천하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 ‘독서’라는 키워드는 자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수단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독서의 귀환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게 너무 많은데 제가 살고 있는 삶 하나로 다 경험하지 못하는 게 아쉬워요.
르세라핌 허윤진이 위버스 매거진 인터뷰에서 독서의 매력에 대해 언급하며 한 말이다. 그는 독서를 통해 타인인 생각을 알아가는 게 흥미롭고,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책의 매력을 공유했다. 윤진은 종종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찍어 업로드하며 일상속 깊이 스며든 독서 습관을 보여준다. 윤진의 독서 사랑은 꾸준히 주목받고 있으며, 지난 2월에는 ‘르세라핌 허윤진이 읽은 책 10’을 주제로 VOGUE 인터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지난 7월에는 뉴진스 하니의 사진 속 가장자리에 위치한 책인 <everything i know about love>가 화제에 올랐다. 해당 도서는 성장 속 우정, 사랑, 직업, 상실 등을 헤쳐나가는 방법에 대한 한 여성의 회고록으로, 하니의 추천 이후 절판되었던 한국어 번역판이 새 에디션으로 출판되며 국내에서 한동안 인기를 끌었다. 하니는 평소에도 다양한 책을 즐겨 읽기로 유명한데, 그 일례로 뉴진스의 자체 콘텐츠 ‘Light jeans’에서 <Is it safe to drink water?>이라는 정치 풍자 도서를 읽는 모습을 보이기도, <The little book of Chanel>이라는 패션 아이템 서적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자체 웹 콘텐츠로 팬들과 독서를 공유하는 경우도 몇몇 찾아볼 수 있다.
세븐틴 도겸의 ‘심야책빵’은 2018년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는 개인 라이브 콘텐츠이다. EBS 라디오 방송 ‘심야책방’을 착안한 제목으로, 간단한 동화책을 읽는 콘텐츠에서 시작하여 최근에는 시집을 읽고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비슷한 형식의 시를 지어서 팬들에게 낭독해 주는 형태로 발전했다.
엔믹스 릴리는 유튜브 스트리밍 형태의 책과 영화 리뷰 콘텐츠 ‘릴리리야 릴리딩’을 2023년부터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다. 앞선 도겸의 ‘심야책빵’과의 차이점은 콘텐츠 내에서 팬들과 함께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닌, 미리 SNS를 통해 릴리가 직접 선정한 책과 영화를 소개한 뒤 라이브 스트리밍에서 ‘릴리더스’와 함께 그 내용에 관해 토론을 하고 생각을 나눈다는 점이다. 릴리는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의 좋은 점은 사람마다 모두 다른 생각과 독서 방식을 공유할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있다고 전하며 남다른 독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케이팝 아티스트의 ‘독서 공유’가 팬들에게 주는 영향은 상당하다. 그 단적인 예로 NCT 재민이 버블(소통 플랫폼)로 추천한 책인 <자존감 수업>은 추천 이후 전월 대비 판매량이 114% 증가했고, 에스파의 카리나가 영상통화 팬 사인회를 통해 추천한 <내게 무해한 사람>은 전월 대비 157%나 증가했다. 이렇게 아티스트와 관련된 책을 따라 사는, 이른바 ‘책민수’는 텍스트힙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케이팝 팬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방탄소년단의 앨범의 모티브가 된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는다든지, 아이콘의 대표곡 ‘사랑을 했다’ 가사의 모티브였던 시 <그거면 됐다>의 작가 못말의 작품을 더욱 찾아 향유했던 사례 등 책민수는 과거부터 유구히 전해 내려오는 케이팝 팬들의 일종의 덕질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팬들이 책민수를 실천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앞서 소개한 뮤직비디오에서 오마주한 도서를 찾아 읽는 방식 외에도 멤버가 직접 읽고 추천해 준 책을 따라 사는 심플한 방법부터, 아티스트가 추천한 책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생일 책방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제 팬들은 아티스트의 독서를 따라 하는 걸 넘어서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떠오르는 순간을 즐긴다. 앞서 책민수의 한 방법으로 이야기한 생일 책방의 경우, 단순히 아티스트가 추천한 책을 전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최진이 생각한 아티스트를 보면 떠오르는 책들을 고심하여 제시하는 책방도 운영되고 있다. 몬스타엑스 형원의 생일 책방을 운영한 한 팬은 ‘시간을 두고 머물며 형원이, 그리고 형원이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고자 형원이 떠오르는 책 여섯 권을 직접 선정하여 추천하기도 했다.
이러한 케이팝 팬덤의 소비문화를 주목한 것일까. 최근에는 텍스트힙의 반향에 발맞추어 책민수를 겨냥한 듯한 독서 캠페인도 등장했다. YES24는 지난달에 ‘Read with me’라는 새로운 독서 캠페인을 시작했다. 평소 독서광으로 소문난 연예인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이 읽는 책, 독서 습관 등을 팬덤과 대중에게 알리고 이른바 ‘책민수’를 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인 것이다.
트와이스 다현이 그 선두주자이다. 다현은 자신만의 독서템으로 팬들로부터 선물 받은 책갈피를 선정하고, ‘모든 게 해결되는데 소설이 아직 반 남음 vs 책이 다 끝나가는데 해결된 게 없음’ 등 간단한 주제로 독서 밸런스 게임을 진행하기도 하며 이른바 독서 TMI를 여럿 공유하였다. 이 캠페인을 통해 다현이 멤버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으로 소개한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현재 실물 도서는 품절 상태라 팬들이 책을 구하기 위해 애를 먹는 해프닝도 벌어지고 있다.
더보이즈 주연 또한 ‘Read with me’의 세 번째 주인공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그의 독서 스타일은 다현과는 사뭇 다른 매력이 있다. 다현은 실물 도서 자체의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책갈피와 독서대 등 다양한 독서템을 사용하는 반면 주연은 특별한 독서템 없이 책을 접기도 하고 밑줄도 그어 가며 읽는 것을 선호한다고 전했다. 또한 다현이 <불편한 편의점>,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등의 책을 추천한 걸 미루어 보았을 때 에세이와 현대 소설 위주의 취향을 가졌다면 주연은 <슬램덩크>와 <크눌프> 등을 추천함으로 보아 만화책부터 고전문학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누비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책민수는 그저 따라 하기에 불과하고, 텍스트힙은 과시욕 충족에 불과하여 실제 독서와는 무관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책민수도, 텍스트힙도 이제는 변화의 물결에 올라섰다. 아티스트는 단순한 책 추천이 아닌 팬들과 함께하는 독서 토론을 시작했고, 팬들은 아티스트에게 어울리는 책을 직접 찾아 나선다. 그러니 독서가 ‘과시하고 싶은 대상’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독서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공유한다는 것, 책을 통해 사랑하는 마음을 공유할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가 결국은 ‘실제 독서’ 증가의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올 한 해 전 세계를 강타한 텍스트힙 열풍에 힘입어 케이팝을 통한 독서의 선순환 또한 순풍을 타고 오래도록 나아갔으면 한다.
* 본 글은 아이돌레 웹진 소유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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