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riter. 인다
지난 6월 20일,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기대를 모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시놉시스만 알려졌을 때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악귀와 싸우는 케이팝 걸그룹이 주인공이라고? 심지어 한국에서 제작한 것도 아니라고? 인터넷 상의 표현을 빌려 “미국이 만들고 한국이 부끄러운”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트레일러가 공개되자 우려는 기대로 바뀌었다. 애니메이션 자체의 퀄리티가 높았고, 캐릭터들의 독특한 매력도 잘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평단의 호평을 받은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시리즈를 만든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했다는 점, 그리고 ‘케이팝 걸그룹이 악귀와 싸운다’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필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공개된 당일 바로 시청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의 케이팝 팬의 입장에서 본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솔직하게 리뷰해보겠다. 우선 한국인으로서 느낀 한국에 대한 고증을 살펴본 다음, 케이팝 팬으로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아이돌 그룹들이 어떻게 보였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스포일러는 전혀 없이 진행할 예정이니 걱정 없이 함께 해주길 바란다.
1. 한국인이 본 <케이팝 데몬 헌터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놀라운 수준으로 한국을 잘 담아낸 작품이었다. 해외에서 한국을 배경으로 한 콘텐츠를 만든 경우, 한국이라는 나라는 도쿄, 상하이 등의 도시와 묘하게 합쳐진 모습으로 등장해 오리엔탈리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 혹은 한국계 외국인 캐릭터가 등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징적인 브릿지, 시니컬하지만 머리가 비상한 엔지니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따른 콘텐츠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모두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우선 영화의 주된 설정부터 살펴보겠다. 케이팝 걸그룹 ‘헌트릭스’는 ‘루미’, ‘미라’, ‘조이’ 세 명의 멤버로 구성된 6(+@)년차 아이돌이다. 그와 동시에 악귀를 막는 ‘헌터’이기도 하다. 이들이 악귀로부터 시민들을 지키는 방식은 바로 노래다. 헌트릭스가 노래를 할 때 ‘혼문’이라는 일종의 결계가 펼쳐지게 되고, 이 혼문이 사람들의 혼을 빼가는 악귀를 막아주는 것이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이러한 모습은 노래하고 춤을 추는 굿을 통해 악귀를 쫓고 사람들의 안녕을 빌던 무당과 겹쳐보인다. 기본적인 설정에서부터 한국의 귀중한 전통문화인 무속과의 연결 지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헌트릭스는 최초의 헌터가 아니다. 조선시대부터 헌트릭스와 같이 3인조로 팀을 이루어 노래를 통해 사람들을 지켜내던 가수들이 늘 있어왔던 것으로 묘사된다. 무복을 입은 조선시대의 헌터, 구한말의 복식을 착용한 1900년대 초반의 헌터, 1세대 걸그룹을 연상시키는 헌터들을 넘어 지금의 헌트릭스까지.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져온 헌터라는 설정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의 대중문화 속 여성 가수가 어떠한 형태로 변모되어 왔는지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적’인 모습을 담아내고자 노력한 부분은 그 디테일에서도 드러난다. 헌트릭스의 신곡 <Golden> 무대의 배경은 조선시대 왕의 용상 뒷편에 있던 그림인 <일월오봉도>다. 자신의 꿈을 펼치며 최고의 시간을 보내는 헌트릭스를 담은 곡이니만큼 무대와 적절히 어울린다. 루미가 악귀와 싸울 때 사용하는 무기는 조선시대의 사인검을 연상시킨다. 사인검은 칼날에 별자리가 새겨진 것이 특징인데, 전투용이 아니라 삿된 것을 쫓는 주술적 용도로 사용되었던 도구다. 유물의 본디 쓰임까지 고려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씬스틸러라고 할 수 있는 까치와 호랑이 역시 맥락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조선시대의 민화 작호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작호도는 호랑이와 까치를 함께 그린 민화를 통칭하는데, 이 역시 악한 기운을 막아주고 좋은 기운을 불러들이는 주술적 의미를 담은 그림이었다.
일상적인 모습에서도 섬세하게 그려진 한국의 모습이 드러난다. 비빔밥이나 잡채에 머물렀던 한식을 넘어, 헌트릭스 멤버들은 힘든 시기에 국밥을 먹는다. 이 식당의 모습 너무도 익숙한 한국의 고깃집을 연상시킨다. 한의원, 목욕탕 등의 공간도 그렇다. 지금껏 해외에서 제작된 콘텐츠에서는 그다지 주요하게 등장한 바 없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는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지는 한국의 장소들이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장소들도 등장한다. 서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남산서울타워, 그리고 다수의 한국 드라마에서 로케이션으로 활용한 다산 성곽길이 그 예시다.
https://x.com/cruzencanada/status/1935900975841333669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참여한 소니 픽처스 아트 디렉터 Cruz Contreras의 게시글
또한, 헌트릭스의 의상에 사용된 노리개와 루미가 받는 전통매듭 팔찌 역시 눈에 띄는 한국적인 액세서리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공개 이후 X 등 SNS에서 소소하게 시작되고 있는 노리개 패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어떤 흐름을 가져올지 기대된다. 이외에도 중간중간 등장하는 한국어 대사, 그리고 케이팝을 들으며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국적인 매력을 마음껏 느끼길 바란다. 영화를 보다가 트와이스(TWICE)의 <Strategy>, 엑소(EXO)의 <LOVE ME RIGHT>이 들려오던 순간의 반가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2. 케이팝 팬이 본 <케이팝 데몬 헌터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는 총 두 팀의 아이돌이 등장한다. 첫 번째 아이돌은 앞서 설명한 걸그룹 헌트릭스다. 두 번째 팀은 바로 이러한 헌트릭스의 활동을 저지하여 악귀들의 힘을 다시금 보강하기 위해 제작된 저승사자들의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다.
먼저, 이들이 정말 케이팝 아이돌처럼 느껴져서 깜짝 놀랐던 요소들부터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작중 등장하는 헌트릭스의 <Golden> 뮤직비디오는 구도, 연출, 전개가 모두 정말 케이팝 아이돌의 뮤직비디오 그 자체였다. 곡 역시 듣자마자 아이브(IVE)의 <I AM>이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걸그룹의 활동곡이었다. 크레딧에 적힌 바에 따르면 유명 케이팝 프로듀서 테디가 프로듀싱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안무는 이미 케이팝 팬들에게 익숙한 댄서인 리정, 잼 리퍼블릭(JAM REPUBLIC) 등이 담당했으니, 실제 케이팝 아이돌을 탄생시키는 전문가들의 손길이 가득 닿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헌트릭스의 또 다른 곡인 <Take Down>은 실제 케이팝 걸그룹 트와이스의 정연, 지효, 채영이 참여한 버전도 발매되었다.
사자 보이즈의 활동곡들 역시 정말 케이팝 보이그룹의 타이틀곡 같다. 청량한 분위기의 <Soda Pop>으로 데뷔한 뒤 컨셉츄얼한 곡인 <Your Idol>을 선보이는 활동의 흐름 역시 인상적이었고, 곡 자체도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연곡, 그리고 중견 보이그룹이 ‘소년에서 남자로’와 같은 수식어를 들고 컴백할 것 같은 분위기여서 그 사실감을 더했다.
멤버 구성 역시 그러하다. 헌트릭스의 멤버 조이는 미국에서 자랐다는 설정이다. 케이팝 아이돌 그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외파 멤버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러한 조이를 설명할 때 쓰인 ‘Maknae’ 라는 단어 역시 정겹다. 나이에 따라 호칭에 차이를 크게 두지 않는 영어권 국가의 케이팝 팬들은 Maknae(막내), Hyung(형) 등의 단어를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디테일이 느껴져서 더욱 즐거웠다. 사자 보이즈의 멤버 구성 역시 익숙하다. 비주얼 센터,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반전 매력을 갖춘 막내, 노출 담당인 멤버, 잘생겼지만 어딘가 엉뚱한 4차원의 신비주의 멤버와 팬들에게 달콤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멤버까지. 어느 남자 아이돌 그룹에서든 볼 수 있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판타지 그 자체다. 사자 보이즈의 예능 촬영 현장에 헌트릭스가 사전 합의도 없이 출연한다거나, 걸그룹과 보이그룹인 두 팀이 합동 팬싸인회를 개최하는 일은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심지어 인기 많은 두 멤버가 나란히 앉아 귓속말을 주고 받는다고? 만약 현실이었다면 얼마나 많은 논란을 몰고 다녔을지 뻔하다. 연말 시상식 역시 마치 세상에 케이팝 아이돌은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 둘뿐인 것처럼 대상 경쟁을 부추기며 진행 된다. 이 역시 영화적 허용으로 봐야 할 것이다. 헌트릭스가 오롯이 자신들의 의지로 컴백 일정을 결정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길에서 만난 팬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모습도 낯설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짚다 보면 갈수록 ‘이들이 정말 케이팝 아이돌이 맞나?’ 따위의 근본적인 물음만 떠오른다. 하지만 애초에 헌트릭스는 악귀와 싸우는 아이돌이고, 사자 보이즈는 저승사자다. 이들의 행보 역시 판타지적인 것이 어쩌면 필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아쉬웠던 점도 있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악귀들 중 일부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도깨비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헌트릭스와 대척점에 선 사자 보이즈는 전원 저승사자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도깨비도, 저승사자도 그리 악한 존재는 아니다. 도깨비는 인간에게 짖궂은 장난을 치고 내기를 아주 좋아하지만, 직접적으로 해를 끼쳤다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저승사자 역시 그렇다. 그저 망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 둘 모두 악귀라고 불릴만큼 악한 존재들은 아니다. 단순히 개념만 빌려오고 한국의 설화 속 그들의 의미는 삭제되어버린 게 조금 아쉬웠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케이팝 아이돌의 무대와 노래는 훌륭하게 재현해냈지만, 케이팝 문화 자체를 활용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였다. 개인적으로 케이팝은 단순히 아이돌의 음악적 성과뿐만 아니라 콘서트, 음악방송 출연 등의 활동, 이를 통해 맺어지는 팬들과의 관계, 팬들이 만들어내는 팬덤의 문화까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가 보여준 모습은 케이팝 아이돌의 활동이라기보다는 해외 팝 가수들의 행보와 더욱 유사했다. 제목부터 ‘케이팝’이라고는 했지만, 케이팝의 껍데기만 씌운 판타지 속의 아이돌 같다는 인상을 버리기 힘들었다.
전반적으로는 크게 만족했다. 케이팝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케이팝과 퇴마라는 요소를 결합시킨 부분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치밀한 스토리보다는 스테레오타입을 깬 한국적 매력을 가득 담은 애니메이션을 기대하고 시청하길 바란다. 한국의 케이팝 팬이라면 곳곳에서 느껴지는 한국적인 매력에 감탄하다가,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의 파격적인(?) 행보에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너무도 현실적인 서울에서, 케이팝 아이돌이 펼쳐보이는 판타지. 한국의 케이팝 팬이라면 한 번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시청하길 추천한다.
* 이 글은 아이돌레 웹진 소유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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