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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연 Jan 29. 2019

[인터뷰] #8. 배우 서예림 (1)

PROJECT #1 - 여성 공연인 릴레이 인터뷰

매거진 [연]의 여덟 번째 인터뷰입니다. 지난 1월 6일 막을 내린 뮤지컬 <명동로망스> 재연에 참여하여 ‘전혜린’을 새롭게, 멋지게 소화해낸 배우 서예림을 만났습니다. ‘팝업 콘서트 – <명동로망스>편’ 합주를 마치고 달려온 그녀는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요. 아무리 스크롤의 압박이 있어도 읽다 보면 어느새 끝나버리는 게 우리가 애정하는 배우들의 감질나는 인터뷰 아니겠습니까. (웃음)

‘로망스 다방’의 혜린과 다른 캐릭터들에 대해, 그리고 한창 활발히 활동해온 지난 두 해 동안 서예림 배우가 고민하며 만들어낸 작품과 캐릭터들에 대한 뒷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디딤돌을 하나씩 차근차근 밟아나가듯 그녀가 더욱 성장하고 깊어지며 많은 관객들과 만나게 된 배역들인 만큼 그녀에게도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이 인터뷰가 그녀의 공식적인 첫 인터뷰라는 말에, 매거진 [연]은 더욱더 큰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인터뷰를 읽고 또 읽으며 수차례 ‘읽는 게 너무 재밌어요!’를 외치던 그녀, 마지막까지 정말 꼼꼼히, 신중하게 자신의 말을 다듬는 모습이 너무나 ‘배우 서예림’다웠답니다.

1부에는 <명동로망스>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가, 2부에는 서예림 배우가 제공해주신 <이블데드> ‘예림 린다’ 사진에 약간의 피 분장이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더욱 빛날 그녀의 삼십 대와 앞으로의 무대를 함께 기다려볼까요. 서예림 배우, 알차고 신나는 경험 잔뜩 하시고요. 충분히 푹 쉬신 후 너무 머지않은 미래에 멋진 모습으로 다시 만나 뵐 수 있길 바라봅니다!



<이블데드> 서예림 / 출처 쇼보트

Q. <명동로망스>와의 첫 만남
원래 <이블데드> 끝나고 작년 하반기에 잠깐 쉬려고 했어요. 근데 언제 또 저에게 <명동로망스>처럼 좋은 작품이, 이렇게 좋은 기회가 찾아올까 싶어서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초연 때 공연을 봤는데 처음에는 ‘내가 전혜린 역을? …해낼 수 있을까..?’ 했어요. 감사하게도 (김)민정 연출님께서 제안해주셔서 비공개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제작사 측으로부터 함께 공연하게 됐다고 연락을 받게 되었어요. 정말 기쁘기도 하면서 또 두렵기도 했어요.

Q. 무대에 나서기 직전에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거의 처음이기에, 항상 공연 전에 전혜린 님을 발끝만치라도 표현해낼 수 있기를, 오늘 하루는 어제보다 더 조금이라도 더 혜린으로써 무대에 설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많이 했어요. 배우로서 ‘나의 노래를 더 뽐내어 보여야지, 연기를 더 맛깔나게 해야지’ 이런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제가 더 ‘혜린스럽게’ 할 수 있을지, 그녀라면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얘기했을지 이런 것만 계속 생각한 것 같아요. 공연 전에 너무 떨리는데, ‘오늘도 서예림이 튀어나오지 않게, 서예림으로서 긴장하지 않게… 제발, 제발 전혜린…!!!’ 이렇게 기도했죠. 
모든 씬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집시처럼’ 무대를 하러 나가기 전에 특히 간절했어요. 그 장면의 대사들이 혜린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사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 공연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씬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대사 하나하나 꾹꾹 눌러 담아서 잘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내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표현하기가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는, ‘그래, 정말 혜린이라면? 정말 혜린이란 사람이 선호에게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까 훨씬 편해지고 전달도 더 잘 되라고요.  진짜 이번 공연은 좋은 책임감과 좋은 부담감으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던 공연이었어요.

Q. 연기적인 호흡에 있어서 신경 썼던 부분이 있다면
연출님께서 첫 연습부터, <명동로망스>는 절대 혼자 할 수 없는 공연이라 합이 너무 중요하고, 혼자만 무언가를 만들어서 연기하려고 하면 죽어있는 것이라 하셨거든요. 항상 제일 강조하셨던 게 ‘상대를 잘 봐라,’ 진! 짜! 로! 보면서 연기하라는 거였어요. 혜린으로서, 자연스럽게 리액션을 하면서 ‘본다’는 게 쉬운 것 같지만 첫 연습 때 참 어렵더라고요. 저희가 다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생각보다 많거든요. 과거 다방 첫 장면도 그렇고 다른 선생님들끼리는 이야기하는 장면이 많은데 혜린의 대사는 별로 없어서, 정말 안 보고 있다가는 저 혼자 가만히 멀뚱히 있게 되는 거예요. 
전작이었던 <이블데드>의 린다는 제가 생각하기에 워낙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라, 상대방과 리액션을 적극적으로 주고받으며 호흡했거든요. 제 원래 성격이 밝고 쾌활한 편이라, 제가 가진 끼와 성향이 <이블데드> 때는 잘 맞았던 거죠. 문제는, 혜린은 린다와 달리 남들이 뭘 하든 말든 자기중심을 지키면서 있고 대사 톤도 혜린의 호흡으로 그냥 무심히 툭 던져야 하는데, 처음 연습 때 모든 상황에 리액션을 하면서 너무 친절이 배어있는 연기를 한 거예요. 연출님이 ‘예림이 자꾸 또 <이블데드> 나온다’ ‘서예림 나온다’ 이러셨어요. (웃음) 처음엔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는데 연습만이 살길이었죠. 
연습실 일화 중에, ‘그렇게’ 노래 끝나고 선호와 혜린이 만나서 “춥죠?”하는 장면 연습 첫날에 오히려 제가 너무 선호 같다는 말도 들었어요. (웃음) 혜린이 더 적극적인 밀도와 에너지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제가 선호처럼 땐땐한 상황에서의 표현으로  ‘긁적긁적…’ ‘하하..’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 ‘땐땐한’은 배우들이 많이 쓰는 말로, ‘뻘쭘한’ 상황을 말한다고 합니다.) 어떤 날은 인환 같다고도, 마담 같다고도 하셨죠. (웃음) 아마 모든 상황에 융화되어서 리액션을 하느라 그랬던 것 같아요. 연출님께서, 흡수력이 좋다는 건 배우로서 장점이지만 그 안에서 제 중심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제 장점이자 단점을 이번 공연을 하면서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요. 씬 연습을 할 때 처음에는 혜린이란 역할을 잘 못 입고, 모든 등장씬에서 혼란스러웠었는데 나중에는 ‘그래, 지금 정말 부족하지만, 끝까지 열심히 ‘혜린’이란 역할을 책임지고 만들어 나가보자’ 하면서 더 열심히 임하게 됐어요. 배우라는 직업은 연습 기간 동안 어떻게든 그 캐릭터로서의 모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예림 혜린’을 만들어나간 과정에 대해
전혜린의 책들도 두세 번 더 읽었어요. 한 번 읽었던 거라 더 쉽게 읽히긴 했는데, 읽을수록 전혜린이 배우인 저보다도 더 예술가 같고, 정말 섬세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감수성의 진폭이 훨씬 큰 것 같았어요. 정말 날카롭게 반응하는데, 그냥 탁 분출하는 게 아니라 내재되어 있다가 그녀만의 섬세함과, 예민함으로 한없이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 그런 걸 잘 표현해야겠다 싶었어요.
쉬는 시간마다, 짬 날 때마다 거의 매일 연출님을 붙잡고 정말 귀찮게 굴었죠. 하나하나 다 여쭤보고. 연출님께서 정말 귀찮으셨을 텐데… (웃음) 친절히 차근차근 다 설명해주셨어요. 입시 때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웃음) <이블데드>에 처음 참여할 때도 진짜 열심히 했지만 그 이상이었던 것 같아요. 설명을 듣고 나면 이해는 되는데 그걸 또 전혜린으로서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려운 거예요. 제가 집이 인천인데 연습 마치고 지하철 타고 가는 내내, 연습하러 가는 길에, 잠들기 전에, 샤워할 때, 밥 먹을 때 등등…. 계속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었어요. 공연하는 동안에도 내내 계속 ‘혜린스러운’ 것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혜린이라면 어떻게 봤을까, 혜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Q. ‘혜린’을 하며 고민이 정말 많았던 게 느껴지는데
제 원래 성격은 약간 털털하고 둥글둥글 한데, 이번에 <명동로망스>를 하며 제가 공연에 있어서는 약간의 완벽주의 기질이 있다는 걸 또 한 번 느꼈어요. 정말 자잘한 거 하나하나에도 신경 쓰고 사소한 거에 스트레스를 사서 받는 타입인 거예요. 공연을 하면서 작은 실수나 잘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사람들은 잘 모를 정도인데도 저는 잠을 못 자고 계속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한 가지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면 또 다른 지점에서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났고요. 다른 캐릭터는 어느 정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데 실존 인물은 조금만 잘못 표현해도 그분의 인생에 제가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어요. 책임감과 부담감이 그만큼 컸던 것 같아요. 


"예림혜린과 민우선호" / 출처 극단장인                                                        "예림혜린과 승윤선호" / 출처 극단장인


Q. ‘혜린’의 캐릭터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왜 하필 혜린이 코트를 벗고 다방으로 왔을까?’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맨발로 뛰어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이 그다지도 혜린을 알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혜린을 가로막는 껍데기는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마 그녀가 처한 환경의 영향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일기에 아버지에 대한 얘기도 많은데, 친일파인 아버지와 부르주아 소공녀라 불리는 혜린은 어쩔 수 없는 애증의 관계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아버지의 말에 복종하면서도 글은 쓰고 싶어서, 처음에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가 그만두고 나왔잖아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심지어 입학시험에서 수학 성적이 0점이었다는데도 합격을 한 걸 보면 얼마나 다른 걸 잘했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싶어요, 그리고 자기가 생각했을 때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건 확실히 넘긴 거잖아요. 자기 소신이 분명하고, 자기 흥미에 몰두하고. 그런 사람인데도 일기를 통해 엿봤을 때는 내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불완전한 사람이라 저도 한 인간으로서 동질감도 느껴졌던 것 같아요.

Q. ‘선호’에 대한 ‘혜린’의 감정,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떠한 것일지
혜린과 선호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관계인 것 같아요. 동경이냐, 연민이냐. 혹은 동질감이나 호기심일지. <명동로망스>에서 남녀가 단순히 ‘썸을 타고’ 사랑에 빠지는 걸 보여주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앞에서의 시간과 감정들이 쌓여서 ‘집시처럼’쯤 왔을 때에는 그들도 모르게 이성으로서든 사람으로서든 호기심과 호감이 생기는 거라 장면 장면마다 선호와의 관계가 조금씩 디벨롭될 수 있도록 하면서 연기하면서 시간을 많이 썼어요. 그런 걸 잘 쌓아오지 않으면, 너무 갑작스럽게 뽀뽀해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갑자기 손 붙잡고 내가 꿈꾸는 세상을 말해주는 게 너무 웃기잖아요.

Q. <명동로망스>에서 ‘시간’이라는 화두에 대해
연출님께서 이 작품에서, 그리고 혜린과 선호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오프닝에서 ‘다음, 다음’을 노래하다가 마지막 넘버에서 ‘지금, 지금’으로 바뀌고, 작품 속 드라마에 시간에 대한 화두들이 다 녹아져 있어요. 혜린이 ‘지금, 이 순간’을 노래한다면 선호는 ‘다음, 다음, 다음’을 말하는 사람이었고요. 
모두가 미래를 궁금해하는 장면에서, 혜린은 구석탱이에서 관심 없는 척 책을 읽고 있어요. 혜린은 현재를 살고 싶어하고 미래에 대해 궁금한 게 없다고 말하는데, 자꾸 미래에서 왔다는 선호에게 시선이 가요.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혜린은 어떻게 보면 완벽하다고 믿고 완벽하게 행동하고 싶어 하지만 그녀 또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꾸 흔들리며 끝없는 내면의 갈등을 했던 것 같아요. 책이나 일기를 봐도 미래를 암시하는 죽음이나 삶에 대한 철학적인 얘기가 되게 많아요. 어떻게 보면 미래에 대해서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려고 노력을 계속했을 거고요. 혜린이 ‘그렇게’라는 노래를 부르며 ‘왜 난 아무것도 알고 싶은 게 없을까’ 말하는 것도 그녀가 고뇌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그런 혜린을 바라보는 선호. 그들 사이의 ‘시간’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Q. 그럼 다른 시대를 살아가던 ‘선호’가 처음 1956년의 다방에 도착했을 때부터 살펴볼까요.
전혜린은 부르주아 소공녀라 다방의 다른 선생님들도 장난을 치지만 함부로 터치하지 못하는데, 선호가 갑자기 벽장에서 튀어나와서 발목을 딱 잡으니까, 화나 짜증이 나기보다는 일단 너무 당혹스럽겠죠. 근데 딱 봤는데 차림새, 머리 스타일, 신발, 크로스백 가방, 거기에 말투까지 모든 게 낯설어요.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2056년’을 얘기 안 하잖아요. 다방 식구들이 ‘퍼포먼서는 아닐까?’라고 하는 게 흥미롭기도 하고, 처음에는 경계할 수도 있고,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딱히 믿지는 않지만 ‘신선하다,’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경찰서 씬에서 선호가 페인트를 던지는 모습을 보며 엉터리지만 그래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봤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시대에 없는 기이한 춤도 추잖아요. (웃음) 어쩌면 혜린이 찾고 있었던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진짜 이 사람이 미래에서 온 걸까?’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선호의 행적에서 자꾸 호기심이 생겼겠죠. 관심 갖고 싶지 않아도 왠지 끌리게 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존재일 것 같아요.

Q. 두 사람의 관계를 조금씩 쌓아나가는 장면들에 대해
최고조는 커피 씬인 것 같아요. 혜린의 일기를 보면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 싶고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싶다는 표현이 되게 많아요. 하루라도 다르게 생각하고 싶어 했고, 평상시에도 ‘권태롭다’라는 말을 소리 내어 많이 하셨던 것 같더라고요. 혜린도 커피는 무조건 끓여먹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갈아 마신다는 선호의 말에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 커피 향이 나고 우유 거품을 내는 걸 보면서 ‘저 사람 참 독창적이고 참신하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심지어 그림, 라테 아트까지 그리잖아요, 어떻게 보면 몇십 년 뒤 선진 문화를 보여주는 건데 혜린의 입장에서는 그게 마냥 멋있다기보다도 어느 정도 신선함,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자신과 동질감을 느꼈을 것 같아요.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면 ‘카아~피 화가’라는 별명도 안 지어줬겠죠.

Q. ‘집시처럼’ 장면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주세요.
이 장면에서 선호와 혜린의 대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는 건 혜린이에요. 선호의 대답이 짧아서 대화가 끊길 수도 있는데 혜린은 계속 질문해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왜 혜린은 선호에게 자신의 이야기, 새와 알 이야기를 자꾸 할까요? 정말 관심이 없다면 이렇게 선호에게 질문을 할 수 있을까요?  선호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을 거고, ‘커피 화가’를 보며 혜린 자신도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도 계속 고민했을 것 같아요. 내가 관심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들이 되게 단순하면서 원초적인 반응이잖아요. 
혜린은 자기 세상을 ‘집시처럼’이라는 노래를 통해서 이야기해줘요. 선호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물어보며 함께 춤을 추죠, 그러면서 선호도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고 마음을 열게 되는 것 같아요, 도도하고 까칠하기만 할 것 같은 혜린 역시 자유롭게 집시처럼,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선호에게도 내면에서 큰 변화가 왔을 거라 생각해요. 우리도 누군가가 꿈꾸고 설레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긍정적인 느낌을 받으면서 ‘나는 뭘까?’ 생각하게 되잖아요. 
<명동로망스> 그 어떤 캐릭터에도 이입해서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2019년을 살고 있는 한 젊은이로서 연습부터 선호에게 이입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예술가들이 선호를 꾸짖거나 꿈을 찾기를 강요했다면 오히려 거부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들은 그저 선호에게도 그런 세상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자기들의 생각과 세상을 보여주기에 선호가 ‘내가 꿈꾸는 세상은 뭘까?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삶의 이유를 되찾고 살아나갈 힘을 얻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블데드> 서예림 / 출처 쇼보트

Q. 다른 여성 캐릭터인 ‘마담(성여인)’의 매력 포인트가 있다면
정말 어렵고 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일인 것 같아요. 안 그러신 분들도 물론 많지만, 요새는 다들 자기 얘기만 하기 바쁜 세상이잖아요. 기자님처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그래서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이런 게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한테는 큰 힘이 될 수도 있고 정말 감사한 일일 수 있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마담은, 우리 중 누군가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고, 들어오는 에너지만으로도 오늘의 기분은 어떤지 다 알아줄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게 애정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잖아요. 알아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항상 관심을 가지고 물어봐 줘요. 특히 부정적인 기운이 있으면 나도 전염되기 싫으니 그냥 내버려 두거나 피해버릴 수 있는데, 박인환 선생님이 김수영 선생과 싸우고 들어왔을 때도 다 얘기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다 해소해주죠. 그녀는 항상 우리 곁에 있어요.
마담에게는 ‘시발 자동차’나 ‘왜’ 이런 재밌는 넘버도 있고 러브라인도 있지만 다른 예술가들처럼 자기 생각을 보여주는 넘버가 없어요. 그래서 ‘마담이 꿈꾸는 세상은 뭘까?’ 궁금해지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니 마담은 크게 소리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와 함께 그런 세상을 꿈꾸고, 함께 울고 웃었던 우리들을 몇십 년 동안 기다려줘요. 지금 시점으로 마담이 아흔몇 살인데 ‘내가 마담이었다면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싶어요. 마담에게도 그 시절의 예술가들과의 시간이 너무나 행복한 추억이었기 때문에 기다린 걸 수 있었던 거겠죠. 마담을 생각하면 그냥 인간 서예림으로서도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Q. ‘선호’가 떠난 이후 로망스 다방의 사람들이 어떻게 지냈을까요. (약 스포일러)
모든 것이 엄청 드라마틱 하게 변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각자 살아왔던 대로, 다른 예술가들과 친한 선생님들과 티격태격하고,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지냈겠죠. 하지만 그 안에서 분명히 변화된 게 있다면 내가 진짜 무얼 하고 싶은지 깨닫게 된 것. 그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일 거예요.
중섭과 혜린 모두 자신이 머지않아 죽게 될 거라는 걸 듣고 나서, 그런 결과에 힘없이 승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하고 싶은, 해야 할 일을 더 명확하게 깨닫게 돼요. 전혜린 또한, 내가 쓰고 싶어 했던 글을 쓰기 위해 더 치열하게 노력을 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일기나 수필도 남기시고, 번역도 많이 하셨고요.
처음에는 ‘일단 써보면 되지, 혜린은 왜 이렇게 글을 쓰지 못하는 것에 고통스러워할까’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저도 완벽주의 기질이 있다 보니 조금 알 것 같더라고요. 일기 하나 쓰려고 해도 고민이 많아지고, 사전 인터뷰지에 답변 몇 줄 쓰는 데에도 첫 시작이 너무 안 떨어지는 거예요.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처럼, 처음이 너무 중요한데 아무리 영감과 소재가 넘쳐나고 쓰고 싶은 말이 많아도 막상 앉아서 쓰려고 하면 너무 어렵고 안 써지잖아요. ‘대충 만들자, 대충 쓰자’ 했으면 쉬웠겠지만 혜린은 자신이 꿈꾸는 게 분명했을 테니까요.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그걸 해냈다는 거에 정말 박수 쳐드리고 싶어요.

Q. <명동로망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면
제가 그 대사를 너무 좋아해요, ‘하고 싶은 걸 가장 열심히 해야죠’와 ‘다음이라는 시간이 존재하기는 해요? 다음이라는 순간이 당신한테 당연히 올 거라고 확신한다면 그건 오만이죠.’ 공연을 본 제 친구들도 그 대사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대사들이 너무 주옥같고 너무나 좋은 메시지들을 담고 있고, 하나도 빠짐없이 의미 있는 문장들이라 더욱 진심을 담아서 연기를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매번 ‘집시처럼’ 장면 전에 소대에서 구두 들고 심호흡하면서 ‘오늘도 전혜린 그 자체로, 전혜린으로서 연기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그랬었어요. 정말 꾹꾹 눌러 담아서 이 좋은 메시지의 대사와 가사들을 잘 전달하고 표현해야만 한다는 부담 때문에 엄청 떨리다가도 무대에 딱 나가면 또 참 이상하게 오히려 편해졌어요. 그 텍스트들에 제가 힘을 받게 되더라고요. 항상 감사히 연기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 씬을 하고 나오면 저 역시 힐링 되고 행복하고 벅찬 기운이 흘러넘쳤어요.

Q. <명동로망스>의 메시지, 혹은 ‘혜린’의 말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서예림과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
전혜린의 말들이 인간 서예림 저한테도 너무 큰 파장과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요. 물론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긴 해요. 현재에 충실히, 지금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저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세상, 참 각박한 세상이잖아요. SNS를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고, 인간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뭔가 껍데기 같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들, 힘들게 경쟁하는 세상 속에서 부딪히고, 싸워가는 와중에 ‘이것도 다 그냥 지나가겠지’ 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주는 의미가 저에게 굉장히 컸어요. 저는 싸움이나 부딪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스트레스받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면 싸워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해서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그냥 “내 탓이오~’’ 하고 넘기던 성격인데, 어느새 제 안에 그게 자꾸 쌓이더라고요. 
만약 제가 혜린처럼 그 순간순간에 충실히 살았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 정도는 그때그때 시원하게 다 얘기하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나 서예림은 그렇게 못 해왔지만, 혜린을 연기하면서 ‘하고 싶은 걸 가장 열심히 하고 살아라, 다음이라는 순간은 없다’ 이런 말을 내뱉으면서 저도 모르게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제 자신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나에게도 다음이라는 건 없는데,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지?’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이 공연을 하면서 제 내면 깊숙한 곳에 좋은 영향을 받고 한 인간으로서도 조금은 성장하게 된 것 같아요.

Q. 배우 서예림에게 <명동로망스>는
이렇게 좋은 작품과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배우의 운이라 생각해요. 정말 감사해요. 초중반에는 어떻게든 잘 해내야겠다는 생각만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후반을 향해 가다 보니 제가 이렇게 좋은 작품을 할 수 있었다는 자체가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저를 믿고 함께 하자고 제안해주시고, 연습 때부터 공연 끝날 때까지 혜린으로서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함께해주신 김민정 연출님께 정말 너무나 감사드리고요. 
조민형 작가님, 최슬기 작곡가님께서 심혈을 기울여서 주옥같은 대사들과 가사, 너무 좋은 넘버들, 너무 좋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을 만들어주신 덕분에 공연하며 오히려 제가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구소영 음악감독님, 홍유선 안무감독님, 그리고 함께 한 배우, 스텝 모든 다방 식구들 진심으로 너무 좋았고 행복했어요, <명동로망스>는 제게 너무 큰 행운이자 복이었어요. 마치 수상소감 같네요. (웃음)


2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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