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CET

연말의 쉼표

by 단정

<4:33>라는 곡이 있다. 이 곡을 공연장에서 들은 건 단 한 번이었다. 2부 프로그램 중간에 배치된 그 곡이 시작되자, 연주자는 두 손을 들어 양 허벅지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렇게 시작된 4분 33초간의 고요. 잘 모르는 곡을 듣고 있어도 2분 이상이 지나면 따분해지기 십상이지만, 무언가를 들으러 온 공간에서 들을 것 없이 가만히 앉아있자면 4분 33초는 그보다 곱절은 길게 느껴진다. 몸을 비틀기 직전 다시 귀를 기울여 본다. 저 멀리서 부스럭대는 소리, 누군가 크흠 큰 숨을 뱉는 소리, 속으로 삼키는 기침 소리, 아무도 의식적으로 소리내는 이는 없지만 어쩐지 숨소리만으로 웅성대는 듯한 어수선함. 그렇다. 악기가 아닌, 이 공간과 여기에 모인 모든 것이 모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연주다. 긴 쉼호흡이면서도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으나 빈틈 역시 존재하지 않는.


어제와 오늘은 내게 있어 4분 33초와 같은 시간이었다. 한 해의 끝자락으로 쉴 틈 없이 촘촘하게 달려오다가 잠시 우뚝 선 시간. 어쩌면 나는 이 시간만을 간절하게 기다려왔다. 10월부터 워낙에 바쁘기도, 아프기도 했던 터라 11월까지만 분주하게 지내다 12월은 쉬어가자는 다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12월 초에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평일, 주말 구분할 것 없이 쫓기듯 바빴던 일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을 향해 돌아가는 날이 되어서야 겨우 빈틈이 생겼다.


어제는 조금 늦잠을 잤다. 늦잠을 자고도 일어나기가 아쉬워 이불 속에서 바스락바스락 오래 뭉그적거렸다. 점심께가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켜 식빵을 꺼내 든다. 계란후라이까지는 귀찮으니 잼을 발라 먹기로 한다. 토스트를 만들어 먹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겉이 바삭한 식빵을 와그작 베어 무는 기분도 좋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곤 빨래를 모으기 시작한다. 한 주간 벗어둔 옷들은 빨래통에 절반쯤, 또 의자 위에 1/3쯤, 행거에 성의 없이 또 얼마간이 걸려있다. 며칠 전에 급한 대로 세탁기 속에 던져둔 흰 빨래가 생각나 먼저 돌리기로 한다. 배가 부르지만 잠시 다시 누우면 어떨까. 침대에 누운 듯 앉은 듯 뒤척뒤척 편한 자세를 잡고 오랜만에 몇 글자 읽는다.


빨래가 텅텅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탈수를 시작하자 슬그머니 일어나서 남은 옷들을 정리한다. 다음으로 돌릴 어두운 옷들을 모아서 세탁기 앞에 옮겨두고 건조대를 펼친다. 옷장을 열어 빈 옷걸이들도 정리한다. 빨래를 널고, 다시 돌리고.


두 번의 빨래만으로도 해가 제법 기울었다. 그래도 조급할 건 없다. 아직 하루가 더 있으니까,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아, 화분에 물은 주고.


나름의 연휴가 벌써 마무리된다는 생각에 아쉬웠는지 이른 아침 눈이 절로 떠진다. 어제는 설렁설렁 여유를 부렸지만, 오늘은 조금 더 부지런할 필요가 있다. 다음 주에 연말을 맞아 집을 비우려면 평소보다 신경 써서 치워둬야 한다. 냉장고를 열어 어디까지 비워둬야 할지 확인한다. 요즘 냉장고가 유독 웅웅 열심히 돌더니 비워줄 것들이 제법 쌓였다.


오랜만에 창문을 활짝 열고 집안 가득 바깥 공기를 쐬어준다. 연말 동안 주고받은 것들이 쌓인 테이블 위를 하나하나 정리한다. 당장에 사용하지 않을 것들은 나만의 보물창고로 옮겨둔다. 카드와 편지는 따로 모아 보관함으로 옮긴다.


혼자 사는 사람은 집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일이 그닥 없다. 가만가만 조용조용 할 몫을 할 뿐이다. 그렇게 평소의 원했든, 의도치 않았든 시끄럽던 나를 내려두고 입을 다문다. 다만 소곤소곤, 찰박찰박 미뤄둔, 혹은 아껴둔 나를 위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나를 지키는 소리를, 나를 보살피는 소리를.


이제야 비로소 한 해를 마무리하고 보낼 힘이 생긴다. 쫓기듯 떠밀려온 한 해의 끝자락에서 고요하나 무음은 아닌 그 중간의 어디에서, 그제야 나는 내가 꽤 잘 해왔다고 느낀다. 크게 숨을 쉰다. 차갑지만 바깥에서 맡을 때와는 또 다른 공기가 꽤 신선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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