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며칠전부터 팔이 안 올라가더니 꽤나 묵직한 통증이 어깨를 짓누른다. 거북목에서 오는 어깨뭉침이려니, 별것 아닌 마음으로 찾아간 정형외과.
"오십견이네요."
"..........네???? 전 아직 만으로 삼십대인데요?!!"
"정확한 명칭은 유착성관절염증이고요, 오십에 잘 온다고 해서 오십견이지만 뭐 빨리 올 수도 있어요"
"........"
#장면 둘.
세상이 빙빙 돈다. 말그대로 어지러워 죽을 지경이다. 잠시 잠깐도 앉아있을 수 없고 조금이라도 몸을 일으켰다가는 속을 게워내기 일쑤다.
"전정신경염이에요"
"......그...그게 뭐죠??"
"한 마디로 귀로 오는 감기죠"
".........."
2022년의 봄, 나의 마흔은 듣도보도 못한 질병으로 주렁주렁 달린 병치레를 하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뤘다.
사실 2002년 스무살을 보낸 나로서는 이십년의 세월이 흘러 맞이한 마흔이 어딘지 각별했다. 전국민이 나의 스무살을 축하(하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축제 분위기였던 2002년처럼, 2022년의 세상도 예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놀랍게도 싸이월드가 재오픈했으며 2000년대의 추억을 소환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쏟아졌다. 소싯적 거리를 강타한 패션 아이템이 부활한 것도 유달리 느껴졌다. 세상이 너의 2022년이 특별하다고 말해주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가장 먼저 허약한 몸이 먼저 '특별한' 잔병치레를 경험하고 있다.
반질반질한 교복치마에 두꺼운 안경, 독서실 지박령으로 살았던 고등학생 시절이 간절히 꿈꿔온 나이가 스무살이라면 막상 그때가 되서는 또 다른 세상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경제력을 갖춘 직업인, 사랑하는 누군가와 꾸리는 단란한 가정, 보다 성숙해지는 나 자신의 모습.
나는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됐을까?
나는 내 삶에 만족하는 당당한 커리어 우먼이겠지?
느긋한 마음과 여유, 성숙함을 지니고 매사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겠지?!
어떤 질문은 해결됐고 어떤 질문은 틀렸다. 또 어떤 질문은 물음표다.
그리고 이제는 알고 있다. 또 다른 이십년이 지난다고 해도 여전히 물음표로 남을 것 같다고.
스무 살이 생각하는 인생이란 어느 지점마다 해결해야 할 과업이 있고 이걸 완수하면 잘 닦인 고속도로가 펼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늘과 쑥을 먹고 인내하는 곰의 심정으로 고등학생 시절을 견뎠으니 대학생이 되면 고생 끝, 행복시작을 외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에 합격하면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고 이윽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디엔드. 잘 짜여진 정답지를 품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댔다.
이십 년의 시간은 정답지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눈물 콧물 쏙 빼며 몸소 깨닫게 해줬다. 잘 닦인 고속도로 따위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직접 부딪히며 알려줬다. 덕분에 깨닫게 사실 한 가지. 인생에서 과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저 멈추지 않고 삶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모두의 과업이라면 과업이랄까.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내 몸을 돌보는 것. 여기저기 아픈 잔병치레로 마흔을 시작하는 것이 어쩌면 더 의미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답처럼 흘러가지 않아서, 때로는 눈물도 때로는 웃음도 쏟아냈던 지난 이십 년이어서 감사하다. 화려한 색깔부터 차분한 모노톤까지 삶의 다양한 색을 만나게 해준 이십 년이어서 또 감사하다. 만선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수확을 거두고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가는 어부의 심정으로 나는 두 번째 스무살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