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7월 9일 오후 10시 30분
언젠가 회식하고 술에 쩔어 돌아와서 침대 위에서 눈꺼풀이 닫히기 일보 직전, 아들이 수학 교과서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와서 물었다.
아빠, 혹시 매우 피곤하시겠지만 이 문제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혹시 봐주실 수 있어요?
아니? 그렇다! 이거슨 하늘이 내려 준 절호의 찬스다! 숙제해라, 공부해라 노래를 불러도 뉘에뉘에 거리면서 귀 막고 쌩하시는 게 특기인 아들이 무려 나에게 숙제를 질문했다. 본인의 의지에 무임 승차해서 공부를 시킬 기회다.
어떻게든 눈에 힘을 주고 술냄새 듬뿍한 숨을 내쉬며 일어나 연습장에 문제를 써 내려갔는데 이거 풀지를 못하겠는 거다. 거기다가 점점 술기운이 몸을 감싸고 나니 너무 졸려버려서 결국 말이지...
미안, 오늘은 회사에서 너무 피곤해서 못 풀어주겠어. 다음번에 다시 물어봐줄래?
너무 아까웠고 진짜 후회스러웠고 한 번 더 물어와 주길 바랐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오늘이다!
퇴근 후에 운동까지 마치고 샤워하고 쌩쌩한 상태로 아들을 맞이한 오늘은 다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며 숙제하면서 모르는 건 뭐든 물어보라고 자신만만하게 질렀는데 돌아온 대답은 맙소사!
< 나는 숙제가 싫어요 >
나: 자,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학교나 학원에서 배운 것 중에 궁금한 거 있어? 숙제하다가 몰라서 질문하고 싶은 거 있어?
아들: 저는 숙제 너무 싫어요. 새로운 거 배우는 건 재밌는데, 똑같은 문제 반복하는 건 그냥 막노동 같아요.
나: 음, 맞아, 음. 대부분의 숙제는 노동처럼 느껴지지. 근데 그 중노동을 왜 시키는 걸까? 학생들이 싫어하는 걸 시키는 건 선생님도 귀찮고 싫을 텐데?
아들: 공부를 워낙 안 하니깐 그거라도 하라는 거 아닐까요?
나: 평소에 공부할 때는 말이지, 시간을 충분히 쓰면서 생각하고 문제를 풀 수 있어. 고민도 충분히 하고 때로는 답지도 보고 GPT 한테 물어도 보고. 그런데 시험 때가 되어서 시험지를 받으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거든? 고민할 새 없이 문제를 보면 바로 준비해 둔 답이 나와야 해.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반복해서 익히는 수밖에 없어. 내가 배운 것을 내 몸이 기억하게 하는 훈련 - 그게 바로 숙제의 정체야.
아들: 흠, 그래서 학원에서 학교 시험 문제 유형 비슷한 거 보여주고 그런 거였군요.
나: 그렇지. 학원은 성적을 올려줘야 하니까. 그러려면 몸에 배게 만들어야 해. 생각 없이도 손이 움직이게.
아들: 근데 아빠, 너무 반복만 하니까 숙제 솔직히 진짜 재미없고, 진짜 하기 싫어져요.
나: 맞아. 그건 ‘재미있는 공부’가 아니고 ‘시험을 위한 기술’이야. (숙제야, 미안하다.) 사실 그런 건 진짜 공부가 아니라 시험 스킬에 가까워. 그런데 현실은 어쩔 수 없지. 지금 네가 다니는 학교나 대입에서 결국 점수로 사람을 평가하니까.
아들: 아하, 그래서 학원은 반복하는 숙제를 내고, 결국 성적을 올려서 부모님이 계속 저를 이 학원에 다니게 하려고 하는 거죠?
나: 솔직히 말하면 그래. 학원으로서도 성과를 보여줘야 하니까. 그래서 재미가 없더라도 결과가 나오는 방식으로 시키는 거야. 숙제를 계속 내고, 반복시키고, 시험 문제에 익숙하도록 연습시키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그러다 보니 재미는 없고 반복되는 노동이지만, 결국 시험을 치면 확실하게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하지.
아들: 뭔가 숙제가 나쁜 X 같아요. 숙제만 하면 공부가 재미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나: 나쁜 X이기도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기도 한 거지.
< 너 자신을 알라 >
아들: 그 똑같은 거 계속 풀고 틀리고 틀렸다고 또 푸는 숙제는 싫지만 새롭고 신기한 걸 익히는 그런 공부는 좋아요. 영어도 그렇고 작곡도 그렇고. 뭔가를 혼자서 연상하고 상상하는 것도 재밌고요.
나: 그건 너한테 ‘학자의 공부’가 맞는다는 뜻이야. 스스로 질문하고, 연결하고, 이해하려는 공부. 그게 진짜 공부야. (그런데 학자의 공부란 게 뭘까?) 시험은 그걸 응용하는 기술이고. 근데 현실에서는 기술부터 익히라고 하니까 힘든 거지.
아들: 근데 공부를 잘하려면 결국 다 외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 맞아. 피할 수 없어. 아직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한다 = 시험을 잘 본다는 그래서 공부를 덜 힘들게 하려면, 나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게 중요해.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숫자를 잘 외우고, 어떤 사람은 단어에 강해. 다들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 거지.
나: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정확히 것’라고 생각해. 네가 무엇을 잘하고 그 잘하는 걸 공부나 시험준비에 어떻게 쓸 건지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아들: 아하, 그러면 저는 보자, 저는 소리 내면서 그 박자로 리듬 타면서 말했던 내용을 외워요. 그래요, 언어 쪽이 더 맞는 거 같아요. 수학보다는 영어가 재미있고. 아시다시피 제가 힙합을 좋아하잖아요. 학원도 다니지만 가사도 해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운 것 같아요.
나: 박자로 리듬을 타면서 외우는 게 어떤 건지 아빠는 좀 신기한데? 너처럼 리듬감 있는 사람은 암송이나 어휘 쪽이 유리할 수도 있어. 확실히 너는 언어 감각이 있네.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은 영어든 국어든 잘할 가능성이 크거든. 수학은 좀 다르지. 규칙이 명확한 논리야. 그래서 외우는 것도 완전히 다른 방식이 필요해.
아들: 그런가요? 영어는 재밌는데, 수학은 좀 어렵고 재미없어요.
나: 네가 지금 느끼는 거 그대로야. 수학은 규칙의 학문이고, 영어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거든. 그래서 수학은 빠르게 잘하는 애들이 있고, 영어는 많이 해본 애들이 잘해. 수학은 타고난 센스가 큰데, 언어는 성실함이 이겨. 그래서 넌 성실하고 인간관계를 잘 이해하면서 서로 간의 규칙을 잘 지키는 능력이 있는 거지.
아들: 생각해 보면 제가 친구들과 디스코드로 온라인으로 이야기 잘하고 내가 작곡한 노래 들려주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언어로 노래로 뭔가 들려주는 거 좋아하나 봐요. 그래서 영어를 재미있어하는 뭔가가 있나 봐요.
나: 맞아. 그래서 네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이 잘 맞는지 알고 있으면, 그 안에서도 스스로 선택하고 조절할 수 있어.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지 말고, 네가 주도하는 공부를 해보는 거야. 그러면 힘든 반복적인 연습에도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게 결국 끈기 있게 그리고 재미있게 공부하는 힘이 돼.
훈계나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는데도 뭔가 결론은 "그러니깐 열심히 해볼까?"여서 걱정됐다. 아들이 피곤해져서 "이제 이렇게 안 할래요!"라고만 안 하면 좋겠다. 물론 숙제나 공부 열심히 한다면 좋겠지. 숙제를 너무 시험용 기술로 몰아붙여 버려서 그것도 아쉬웠다. 아들 편에서 들어주려 하다 보니 한쪽으로 치우쳐 버리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라도 아들과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이 피곤하면서도 행복한 시간이 조금이라도 계속될 수 있도록 내가 끈기를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