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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서C Dec 08. 2015

삶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읽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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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이 그랬는지,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신문기사를 볼 때나 TV 뉴스를 볼 때 사건 사고 자체보다는, 사건의 주인공과 그 주위의 사람과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파리 테러가 났을 때도 그랬고, 시리아에 포탄이 떨어지는 기사를 볼 때도 그랬다. 그런 성향이 먼 지역의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 일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도 같았다.  집회자들의 집회를 뉴스로 볼 때도 술을 마시고 보도블록 옆 전봇대에 기대어 있는 아저씨를 볼 때도, 우리 학교에서 항상 걸식하던 삼순이란 개가 차에 치여 비명횡사할 때도 나는 여전히 '사건'보다는 각자의 '개별성'에 천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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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테러를 일으킨 그 사람들은 참혹한 상황을 결심하고 실행했을 때 어떠하였을까. 아니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고 총알이 날아올 때 도망가거나 숨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공포였을까. 시리아에 퍼부어진 인명 살상용 포탄들이 땅으로 떨어질 때 어쩔 수 없이 시리아에 남겨진 국민들은 어떠한 마음일까. 집회 속에서 피켓을 들고 행진하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저씨는 무슨 일로 전봇대에 기댈 만큼 술을 마셔버린 것일까. 삼순이란 개는 미처 피하지도 못했을 만큼 강력한 힘에 받혀 피를 쏟으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실이 담긴 기사 속에서는 이러한 직접적인 생각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니, 나는 다만 상상한다. 때론 그들의 삶이 궁금하여 세부적인 정보를 찾기도 하고, 역사를 뒤지기도 한다. 각자의 개별성에 공감하고 아파하면 어느 새 그들의 세계가 미친 듯이 궁금한 것도 여러 번이다. 그 궁금함이 최대치로 증폭되면,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가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것. 소설이든 시든 에세이든 무엇이든 읽는다. 문학의 힘은 그런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담긴 세계, 그 세계 속에서 각자가 욕망을 분출하고 행동하며 세계를 이룬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고 그 시대 속에서 각 개체가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삶을 비장하게, 때로는 비루하게 살아간다. 그러한 문학 책을 읽고 있노라면, 각자의 삶을 객체로나마 나는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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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훈의 소설을 왜 좋아하는 지를 한동안 고민했었다.  <자전거 여행>을 읽다 푹 빠져서 <칼의 노래>, <강산무진>, <현의 노래>, <남한 산성>, <공무도하>, <흑산>이 지금 내 책장에 한 줄로 자리하고 있다. 김훈의 책들을 모아 읽어오면서, 직선적이고 단문이며 한칼에 베는 듯한 남성적 문체에 끌렸다고 생각했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핵심을 찌르는 문체에 가슴이 저렸던 것도 같다. 취재기사를 보는 것 같이 사실을 다루고 있는 문장 속에서도 그가 의도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동의어반복을 꺼내는 문장은 참신하고 단어와 조사 속에 숨어있는 의도를 파악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그의 글이 나를 끌고 가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아니었다.


라면을 끓이며 / 김훈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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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를 읽었다. 그동안 연재했던 글을 모아 펴낸 산문집인데, 읽으면서 알았다. 그의 글은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각각의 '개별성'을 생각하게 한다. 김밥을 먹으면서 먹고사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를 느끼는 김훈은 우리 모두가 대책 없이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느낀다. 그 지겨움 속에서 우리는 개별성을 버리고 조직을 보고 사회 속에서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김훈은 그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 구성품을 보고 사건 속 인물에 집착한다. 1부의 밥을 다룰 때도, 2부의 돈, 3부의 몸을 을 다룰 때도 그는 한결같다. '모든 생로병사는 개별적이어야 한다'(p149)고 말하는 그는 '개별적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운 말도 위안이 되지 못한다'(p176)고 단언한다. 그래서 김훈은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것이다'(p176)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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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유민이의 이야기, 최부 등의 이야기도 그랬고,'어느 소방관의  죽음'에서 서형진 소방교의 죽음을 다룰 때도 그랬다. 심지어 몸을 다룰 때도 손, 발의 개별성도 살아있다.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 <남한 산성>을 읽을 때도 나는 '인조'와 대장장이 '서날쇠'의 개별적 삶을 동등하게 그려 넣는 김훈이 좋았었다.  산성에 갇힌 그들의 운명은 왕이든, 백정이든 다 느끼는 고통과 삶에 대해 느끼는 연민은 같다. <흑산> 속에서 순교를 당한 자나 그렇지 않은 자 모두의 삶을 개별적으로 다루는 그의 시선이 따뜻했다. 그는 필히 작가가 되어야 할 운명인가 보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사건을 보는 통찰력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된다고 믿는다. 주변부 인물의 욕망과 상태를 꿰뚫어 각각의 내면을 다양하게 담아낼 수 있어야 좋은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독자들이 요구하는 욕망의 대리만족, 또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행동을 반영하는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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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한 편을 읽고 주절주절 글을 썼다. 내가 김훈 작가를 좋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기쁜 마음에 한달음에 써 내려갔다. 각 개개인의 삶은 언제나 소중하며 아름답다. 비록 비루하고 천해 보이고 지위에 낮아 보여도 그들의 삶은 가치롭다. 사건의 주인공들만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 그들의 옆에는 그들보다 더 고통을 감내하고, 그들보다 더한 삶을 이어가며 견디며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 이웃들이 있다. 주위에 포탄이 떨어질 때 그 사람은 그것만큼 더한 슬픔은 없다. 집회 속에서 전체주의를 경계하며 시위에 뛰어든 그 사람은 마음이 간절하다. 집회 시위를 막아야 하는 경찰들은 두렵고, 괴롭다. 전봇대에 기대어 있는 아저씨는 자신이 느끼는 삶의 힘듦이 모든 세계의 뉴스를 압도할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세계는 세계 전체와 맞먹는다는 김훈의 말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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