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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서C Jul 03. 2017

시인 / 동주

 아름다웠지만  치열했던 시인 동주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

그 시대를 살아간 것도 아니면서 일제 강점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고 시립니다. 나라 없는 우리 민족의 고단함과 서러움이 그려져서 이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그 시대의 아픔이 명확히 치유되지 못하고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역사로 남아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알아가면서 정의와 동떨어진 현실이 내가 딱히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을 알았을 때, 제국의 시대였고 만행의 시대였던 일제 강점기를 애써 외면하곤 하였고, 친일 부역자들의 성공도 삶의 한 방식이라 여길 때도 있었습니다.


일제 시대에 빼앗긴 나라 안에서 지식인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었을 겁니다. 나라잃은 슬픔과 분노로  항일을 외치거나, 영원할 것 같은 일본 제국에게 충성하면서 철저히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것도 아니면 그냥 주어진 현실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몇 안 되는 선택지였을 것입니다. 청년 윤동주도 그러하였을 것인데 그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끊임없이 선택지에 대해 고민해 봅니다. 그리고 그는 무한한 고민을 안은 채 가장 사랑하지만 아픈 '시 쓰기'를 선택했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맑습니다. 시어는 정결하고 아름다워, 그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고요해집니다. 서시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며 그가 말한 것처럼 근원적 죄의식과 참회의 감정이 시 속에 아로박혀 있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시인 윤동주는 내면에서 나오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 쓰기에서 끝나지 않고 눈을 세상으로 돌리고 현실을 직시합니다. 그러하기에 그의 시는 아름답지만 끊임없이 현실과 싸우는 치열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열함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과 맞물리며 윤동주의 시 세계는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되어 버린 거죠. 어느새 윤동주는 야만의 시대에 우리가 애써 찾는 먹먹하고 그리운 시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윤동주를 읽는다는 것은 애써 외면한 우리의 좌절의 시대를 복구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시대를 같이 놓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을 떨어뜨려놓고 사람 그 내면을 평가한다는 것은 박제해놓은 야생 동물을 보는 것 같이 온전하지 못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편의 소설, 시 등은 그것이 아무리 순수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 상황이 반영됩니다. 삶의 고민과 현실적 상황이 플롯이 되고 시상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가 삶을 어떻게 살아왔고,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와 그의 시를 떨어뜨린다는 것은 온전한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박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하기에 강점기의 친일 문학은 비판받아야 하며, 혼란과 야만의 시대에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시인 동주에 나오는 한 부분입니다. 몽규와 달호는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여야 하는지, 현실을 제거한 내면의 울림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에 관해 다툽니다.

   "자네 말처럼 그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면 오죽 좋겠나? 하지만 신진 작가들은 사람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분석하는 데만 힘을 기울이고, 정작 그 인물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회 현실은 외면하고 있네."

  "그렇지만 거리의 구호나 현실의 모사가 그대로 문학이 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런 작품들에서 나는 그리 감동을 받지 못했네."

 "문학의 성취로 보자면 물론 아쉬움이 있지. 하지만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 문학의 할을 고민했던 것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야."(p107)

그 시대에 이러한 논쟁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어젠다였습니다. 다만 그 순수를 앞에 내세워 우리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친일을 미화한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멋진 서정 작품으로 포장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광수나, 서정주의 작품은 저에게는 쉽게 읽히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반대쪽에는 시로서 시대의 아픔을 치열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언어로 고민한 윤동주가 있었습니다.


"동주는 결심했다.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으리라.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이라면, 되지 않으리라. 하나의 시어를 찾기 위해 수없이 버리고 취하는 연마의 과정이 저렇게 쓰이는 것이라면, 더 이상 쓰지 않으리라."(p127) 여러 번의 고민과 절필, 그리고 육첩방의 남의 나라 타국에서 우리말로 시를 쓰며 시대의 아픔이 개인의 아픔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경험하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아픔을 맑은 언어로 바꾸어 놓은 윤동주이기에 그의 작품은 아직까지 읽히고 또 읽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정의가 제대로 소명되지 않은 지금의 시대에는 더욱더 그러할 수밖에요.  


<시인 동주>는 안소영의 소설입니다. 우리의 옛 시대의 선인들이 써낸 문구와 전해오는 이야기를 역사와 문학적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전작들과 같이 이 책도 그러한 연장선에 있습니다. 정확한 고증과 역사적 사실로부터 윤동주의 삶을 소설로 복원해 내는 안소영의 능력은 여전히 빛을 발합니다. 마치 윤동주가 처한 상황에 들어가 있는 듯이 고뇌하고 번민하는 시인의 마음을 잘 포착해 내었습니다. 곳곳에 시를 쓰는 윤동주의 모습과 그가 처한 상황을 잘 묘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간중간에 나오는 윤동주의 시가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시인이 닿은 마음을 이해할 때 시는 더욱 우리 맘에 다가올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끝으로, 윤동주 시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아픈 마음으로 읽었던 시 한 편 적고 마무리지을까 합니다. 그럼 이만.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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