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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서C Nov 01. 2015

'사도' 속의 권력과 인간

영화 '사도'와 책 '권력과 인간'에 나타난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정병설 교수의 책 <권력과 인간>을 먼저 읽고 영화 <사도>를 보았다. <사도> 영화에 큰 영향을 끼친 참고문헌이 이 책이고, 지은이가 영화의 자문을 맡았으니 둘의 관계는 상당히 깊다. 그래서 '영화는 책을 어떻게 반영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영화를 서둘러 찾아봤다. <권력과 인간>은 관련 논거와 실증적 자료가 풍부하고 인간 객체의 심리를 분석해 논리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능력이 탁월하며, 이준익 감독은 그의 필모그래피가 말해주듯, 자신만의 시선으로 장면을 해석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두 작품의 관계가 깊고, 텍스트를 생산해내는 작가와 감독의 능력이 빼어나, 나는 줄곧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공감했다. 그들의 세계 속에서는 사도세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1. 영조에게는 사도가 아들이 아닌 세자였다


영화에서는 영조의 마음을 덜 묘사한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을 그리고 사도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영조의 내면을 축소한 경향이 있다. 오히려 세자 사도의 초기에 비치는 정치적 영민함을 꺾는 영조를 표현하려 하면서 노론 뒤에 숨어있는 영조가 더욱 부각된다. 사실 영조는 자신의 권력을 잘 사용한 왕이었다. 탕평책을 이용하여 당파 싸움을 최소화 하려 노력했고, 균역법, 치수사업 등 백성을 위한 통치를 해 나갔다. 더욱이 학문에 관심이 많아 끊임없이 공부하고 여러 책을 집필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노론 속으로 숨어 들어간 왕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문제는 그가 평생 안고 있었던 그의 출신성분과 왕위 등극 과정의 정통성 논란이었을 것이다. 성분이 낮은 궁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이복형인 경종이 있었기에 왕이 될 수 없는 왕자의 신분 속에서 그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죽을 수도 있을 위험과 불안을 느꼈다. 권력 앞에서는 때로는 부모, 형제도 없었음을 윗대의 역사로 쉽게 파악 가능했다. 그런데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었다. 그에게는 일종의 위기였고 기회였는데, 대리청정을 위임받으면서 그는 절실했을 것이다. 멸시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왕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함을 영조는 스스로 느꼈다.      


영화를 보면 영조는 좋지 않은 일을 겪거나 말을 들으면 대야에 물을 받아 양치질하고 귀를 씻는 행위를 반복한다. 또한 의사 결정할 때 출입하는 문이 다르다. 한중록에 나와 있듯이 영조는 죽음과 삶,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사랑하는 것과 증오하는 것이 명확한 왕이었다. 그게 그의 미천한 출신성분과 반역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리면서 일종의 정신적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런 완벽주의적이고 이분법적인 성격이 불안과 맞물리면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정별설은 책 <권력과  인간>에서 영조에게 강력한 편집증이 있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p23~25) 그게 맞을 듯 싶다.


결국 영조의 이분법적 사고로 인한 편집증이 자신의 아들을 대할 때도 드러나게 된다. 영조에게는 아들이기 이전에 사도는 세자였다.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는 영조의 세계에서는 세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욱이 본인과 같은 후궁의 자식인 세자는 자기와 같은 운명이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도를 완벽하고 허점 없이 키워 종묘사직을 이을 후계자로 키워야 했다. 그것이 위험과 불안을 감당해야 할 왕의 숙명이라 여겼다. 편집증적인 이분법적 사고가 그의 머리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사도는 피붙이로서의 아들이 아닌, 종묘사직을 지키는 자신의 후계자로서 세자였던 것이다.



2. 사도는 세자가 아닌 아들이고 싶었다


어릴 적 사도는 영민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영민함은 학문을 즐기는 영민함이 아니었던 것이 문제였다. 나가서 즐기고 자연과의 친밀함을 더 우선하는 능동형 인간이었던 것 같다. "사도세자는 기질자체가 어디에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사도사제는 학자형  인간이라기보다 예술가형 인간이었다."(p113, 권력과 인간)고 말하는  것처럼 영조와 성향이 달랐다.  실제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는 장면인, 영화에서 나온 개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는 사도의 모습은 책과 떨어져 있는 예술가형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예술가형 인간에게는 틀에 박힌 제도 속에서 정적인 제왕학을 계속해서 공부해야 하는 것이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기질을 꺾어가며 학습해야만 했던 그는 점차 학문 연마와는 담을 쌓기 시작하고, 그림과 무예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의 합이 영조의 심기를 거슬렀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학문에 힘쓰는 세자 사도를 원했던 영조는 그렇게 하지 않자 불같은 성격으로 사도를 닦달했다. 그리고 그러한 불편한 심기가 쌓여 사도를 공공연히 꾸짖고 트집을 잡았다. 처음에는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냥 무엇이든 미워지는' 마음으로 변해버렸던 것 같다. 연인의 죽고 못 살 것 같은 사랑이 미움으로 바뀔 때 때론 극단적인 광기를 발산하기도 하듯이, 영조는 사도에 대한 미움은 점차 자식을 대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세자는 좌절했다.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에 왕가의 법도대로 부모의 품에서 자라지 못한 것도 힘들었을 텐데 아버지의 계속되는 멸시와 꾸짖음은 그의 결핍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기질과 의무 사이에서 그는 답답했다. 아버지의 뜻에 맞추려고 노력할  때마다 그것 역시도 아버지는 항상 부족하다며 다그치는 상황에서 그는 할 수 있는 게 점차 없어져버린 것 같다. '비가 오는 것도 네 탓'이라고 다그치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벗어나고 싶었다. 결핍을 채우고 싶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환경적으로 무엇이든 다 갖추어져 있는 세자가 아니던가. 정병설은 <승정원 일기>, <영조실록> 등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식욕이 넘쳐 몸이 비대해졌고 나이가 들면서 이성에도 눈을 떴다.'한중록'을 보면 영조가 용납하는 수준 이상으로 많은 궁녀와 관계를 맺었다. 나중에는 기생 놀음에 심지어 여승까지 끌어들이기까지 했다."(p118, 권력과 인간) 고 썼다. 


세자는 미쳐갔다. 당파싸움으로 희생되었다는 설을 정병설은 강하게 부정한다. 객관적 사료와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당파 희생설보다는 광증을 보이는 사도의 모습이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사도는 일종의 정신병처럼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병인 의대증으로 고생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료에도 정확히 나타나는데 의대증이 일어날 때마다 내관의 목을 벤다. 목을 베고 그 목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잔인하다. 사도는 자신이 사랑하는 궁녀도 이 의대증이 원인이 되어 때려 죽인다. 그 밖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살인은 사도가 공감 능력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같은 낱말이 사도에게 오버랩되었다. 예술가형 사도는 결국 광기에 사로잡힌다. 사도는 가장 자신을 지지해주어야 할 아버지의 멸시와 화를 주체할 수 없어 미쳐갔다. 사도는 세자이기에 앞서 아들로서의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는데 충족되지 못했다. 사도는 세자가 아닌 아들이고 싶었다. 



3. 권력욕이 가장 무섭다


권력은 둘로 나눌 수 없다. 권력을 잡기 위해 사람을 제거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역사에서 많이 보아온 일이다. 영조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대리청정을 하면서 사도를 더욱 옥죄지만 사도에게 자신이 생각했던 후계자로서 세자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권력을 놓지 못하는 영조는 그 권력이 후대에도 계속 권위를 가지고 이어지길 원했다. 세자에게 점차 믿음을 거두었던 영조는 대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 정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세자와 달리 학문에 뜻이 있고 배움에 열정적이었다. 영조는 유독 정조를 예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예뻐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으나, 그럴수록 사도는 소외되고 외로웠다. 영조는 고민이 깊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광증이 보이는 아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영조는 사도를 버리고 정조를 선택했다. 그것이 종묘사직을 생각하는 올바른 방향이라고 믿었다. 너무도 오래 살았던 영조는 자신과 너무 다른 사도를 건너뛰고 자신이 생각했던 세자상을 지닌 정조로 권력이 이양되기를 원했다. 권력은 그런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도 때론 권력 앞에서는 대척점을 이룬다. 미쳐간 사도는 그 비정한 권력 이양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불안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실감 나게 그려지는 사도의 반란은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칼을 들고 시내를 활보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정병설은 "이즈음 세자는 이성을 잃으면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해버리겠다.' '칼을 차고 가서 어떻게 해버리고 오고 싶다.' 등의 말을 하곤 했다. 웃대궐 경희궁에 사는 어떤 사람, 곧 영조를 칼로 죽여버리겠다는 말이다."(p216, 권력과 인간)라며 한중록의 내용을 근거로 반란을 이야기했다. 그 후에 벌어지는 일렬의 과정과 뒤주에서 죽어간 사도의 모습은 영화에서 더욱 극화되어 나타나  흥미진진하다. 


7일 동안 영조는 사도를 뒤주 속에서 죽인다. 관련 문헌들을 보면 영조는 후회보다는 분노와 단호가 더 앞섰다고 하는데 만약 진정 그렇다면 쉽게 납득가지 않는다. 아들을 죽게 한 아버지가 어찌 저리 잔인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러한 끊임없는 의문은 당파희생설 등을 낳았으나 증명할 수 없는 설이다. 오히려 실증적인 문헌 연구 내용은 정조의 단호한 대처로 세자를 죽게 했다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없었지 않았을까. 반란을 꾀한, 미쳐버렸다고 판단한 세자를 영조는 제거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더욱이 영조에게는 정조가 있었다. 권력은 그만큼 무섭다. 권력 앞에서는 혈육도 끊을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권력과 인간 / 정병설 / 문학동네


4. 영화는 책을 어떻게 반영하는가


사도는 <권력과 인간>을 쓴 정병설 교수가 자문을 맡았다. 엔딩 크레딧의 참고문헌에 <한중록>과 이 책이 맨 위에 소개되어 있다. 그만큼 이준익 감독은 이 책들에서 영화의 기본 뼈대나 대사들을 가져왔다. 당파희생설로 영화를 설명하는 사람도 있던데 아마도 이덕일의 주장에 공감해서 설명한 것이겠으나, 이 영화는 이덕일의 주장을 배격하고 참고하고 있지도 않다. 이준익은 완벽한 세자를 꿈꾸는 아버지와 사랑을 받고 싶은 광기 어린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권력과 인간>, <한중록>을 연이어 읽고 영화를 본 탓에 영화 장면과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영화를 볼 수 있는 행운이 나에게는 있었다. 영화는 치밀하게 문헌을 연구하고 고증한 테가 역력하다. 이준익은 사극을 자신의 관점으로 풀어내는데 상당한 장점이 있는데 이번에는 정공법을 택했다. 한중록과 실록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대사로 절묘하게 끌어왔으며, 문헌에서 나오는 장면을 실제적으로 재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당시의 상황과 장면을 영상으로 볼 때의 설렘과 쾌감이 있었다. 세자의 수업 모습과 아버지에게 무시당하는 상황, 인원황후의 곡좌와 예법에 대한 강조, 영조의 대리청정의 모습, 세자가 갇힌 뒤주의 생김새, 미쳐가던 세자가 만든 무덤 같은 지하방과 관속의 세자, 죽음을 예감할 때의 사도가 혜경궁에게 했던 대화, 사도를 죽인 후 개선가를 울리면서 행차하는 상황 등 디테일한 묘사에 책과 영화를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더해졌다.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와 그렇게 행한 아버지 영조 이야기는 조선 역사를 보아도 가장 흥미로운 사건 중에 하나다. 아버지와 아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혈연 관계다. 그런데 그런 혈연을 영조가 스스로 끊었다. 얼핏 보면 비정한 아버지로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영조의 고민도 만만치 않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서 사도세자를 광인으로 그려놓은 것이라 반론할 수도 있지만 정조가 세자의 아들이라고 볼 때 전해 오는 역사적 기록이 광증을 과장해서 그렸다고 할 수 없다. 정조가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기록을 세초 할 것을 청한 것으로 볼 때 오히려 축소했다고 본다. 사도의 광증은 다양한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그려진다. 역사 연구가 기록을 정밀하게 해석하는 연구일 수밖에 없으므로, 사도세자의 광증을 말하고 있는 정병설의 책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결국 영조는 아버지로서가 아닌 왕으로서 권력을 지켜야만 했고, 끝끝내 자신의 아비에게 사랑을 얻지 못한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 이 글은 <권력과 인간>과 <한중록>에 꽤 많이 기대고 있다. 이덕일의 주장과 책도 있는데 <권력과 인간>에서 정병설의 반박으로만 접해봤을 뿐 살피지 않았다.

* 영화 속 유아인은 너무 멋있는데, 실제 책에서 그려지는 사도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겼으면 용서를 받았을 수도 있었겠다. 영화는 유아인이 살렸다.

* 책 소개해줘서 감사해요. 덕분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세계를 치열하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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