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여자

아는 사람B

by 일향지

얼마 뒤, 퇴근길에 들른 민정의 약국은 셔터가 내려지기 직전이었다. 민정은 나를 보자, 내리려던 셔터를 위 로 올리고 약국 문을 다시 열었다.

“사람들이 많아져서 바쁘겠다.”

“약국 옮길까 해.”

“왜? 직원을 더 늘리면 되잖아”

“그냥 이곳이 싫어”

“하긴 나도 그러면 좋긴 해. 이 건물에 보기 싫은 인간이 있어서.”

“보기 싫은 인간?”

나는 그 사이 우철과 있었던 일을 다 뿜어내기 시작했다. 며칠간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꾹꾹 눌러 담은 탓인지 이야기는 조절 안 되는 괄약근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처럼 마구 쏟아져 나왔다.

민정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급기야 그녀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하고선 자리를 떠났다. 나의 관심은 곧 민정의 옆자리에 있는 쓰레기통 쪽으로 향했다. 쓰레기통에는 다 쓴 약 박스가 담겨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페노바르비탈이라는 수면제였다. 이 건물에 정신과도 없는데 수면제가 처방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민정이 들어왔다.

“저 수면제 처방 가능해? 의사 처방 없이?”

나는 쓰레기통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환자 상태에 따라 달라”

그녀는 먼 곳을 응시하며 딴청을 부렸고, 눈빛은 고요했다.


그건 여고시절 극기 훈련을 갔던 어느 날 밤의 민정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친한 친구들과 서로의 묵힌 가정사를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민정은 농담 식으로 엄마 얘기를 늘어놨다. 불만도 자랑도 아닌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민정에게 뜬금없이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너는 왜 아빠 얘기를 안 해?”

민정은 먼 곳을 응시하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날의 눈빛에 대한 의문이 해소된 건 5년 후가 지나 민정의 엄마 장례식장에 갔을 때였다. 식장 한편에서 “와줘서 고맙다”며 과장된 몸짓으로 나를 맞는 그녀 옆에 민정의 아빠뻘 되는 상주 분이 서 계셨다. 민정이 아빠인 줄로 짐작한 나는 “민정 아버님, 얼마나 상심이 크세요”라며 의례적인 인사말을 했다. 상주가 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뒤로하고 나는 뒤에서 친척쯤 되어 보이는 분들이 숙덕거리는 말을 들었다.

‘아니... 민정 엄마 재혼했었어?’

‘민정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빠를 왜 지금 찾아?’

그 후 1년 정도 민정은 연락이 없었다. 민정의 핸드폰 자동 응답기에는 수신이 되지 않는다는 응답만 들려왔다. 민정에게 연락이 다시 온 건 민정이 약사고시를 붙고 난 뒤였다.

“잘 지냈지?”

민정은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오랜만의 연락에 반갑다기보다는 화가 나서 전화를 끊을까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측은하기도 했다. 나는 어느덧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내가 휴학을 오래 했잖아. 학교도 졸업하고, 시험 준비도 해야 해서 사람들한테 연락도 못하고 지냈어.”

그러고 보면 그녀는 늘 최악의 상황에서 혼자를 선택해왔다. 그녀는 아픔은 나누면 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몇 배가 불어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오랜 혼자가 끝난 뒤 가벼워질 때쯤 사람들 앞에 나타났고, 사람들을 향한 그녀의 언어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 언어에는 고통도 웃음도 없었다. 바람결에 지나가는 농담 같았다.

“있지. 이 언니가 그동안 정리할 게 많았단다.”

그런 말투는 그녀가 첫사랑에 실패한 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대학 때 의대생과 약대생들이 함께 하는 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그녀는 어느 날, 볼이 빨개진 채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라고 내게 말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술이 흥건해져서 행복해했다. 그녀를 알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흥분이었다.

“너도 흥분할 때가 있구나! 얼마나 좋길래?”

“결혼하고 싶어. 그 사람이 나 졸업하면 바로 결혼하자고 했어.”

민정은 이어 그에게 줄 선물을 내밀었다. 토노형 모양의 손목시계였는데, 밤색형 가죽 줄이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수시로 시간을 체크하며 회진을 돌아야 하는 인턴에게 실용적인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채 휴학을 하고 사라졌다. 그때도 그녀는 6개월쯤 지나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을 했다. 내가 결혼 진행 상황에 대해 묻자,

“평생 한 남자만 사랑하고 사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니?”라며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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