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우철의 술잔에 찍힌 지문이 민정의 것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 그녀가 살인자라는 오명을 쓰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민정은 누군가를 죽일 정도로 감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특유의 냉담함이 범죄자들의 특징적인 성향이라고 한다면, 민정이 아예 그렇지 않다고 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회사에 외근을 간다고 하고, 오전 8시부터 민정의 약국 앞에서 우철의 사건 담당 경찰과 함께 민정을 기다렸다. 9시가 되자 약국 직원 두 명이 연이어 나와 여느 때처럼 일했다. 민정이 없다고 해도 무리 없이 운영되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직원들에게 민정의 행방을 물어보았지만, 알지 못했다.
민정의 약국 안에서 그녀에 대해 묻는 경찰의 질문에 나는 몽롱한 채로 응수했다. 분명 10년 이상 된 친구였다. 이런 경우 “내 친구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못 된다”라고 호소하던가, 적어도 그녀의 행방에 대한 정보 한두 개쯤은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낯선 곳에 버려진 고아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직원 약사 중 한 명은 그렇게 굳어진 나를 처음엔 2-3분마다 한번씩 힐끗거리더니 곧 체념한 듯 일에 전념했다. ‘그래도 약국에는 출근하겠지’라는 나의 기대는 시계가 오후 12시를 넘어가자 일말의 기대도 없이 무너졌다. 때마침 다급히 전화를 받고 약국 안으로 들어온 경찰은 위치 추적을 통해 “우철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민정의 핸드폰 위치를 알아냈다”라고 하더니 이내 자리를 떠났다.
내 몸은 이내 차갑게 식어갔다. 차갑게 식은 몸은 정신마저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감정은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오로지 이성만 꼿꼿이 남아 사그라드는 정신을 떠받치고 있었다. 민정의 실종 앞에서 나를 얼어붙게 만든 건 수치심일까? 당혹감일까? 나는 내 감정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드라마 초반부터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하고, 한 회에도 울다 웃다를 몇 번씩 반복하는 나는 지금의 내가 낯설었다. 머릿속에선 같은 질문만 맴돌 뿐이었다. ‘내 감정은 왜 이리 부조리한 것일까? 그리고 그녀는 나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전교에서 늘 상위권에 들었고, 3년 내내 전체 학급에서 하나뿐인 우등반에 속했다. 키도 비슷했으며, 심지어 내 생일은 민정과 하루 차이였다. 1, 2학년 때는 생일 순으로 3학년 때는 키 순으로 번호가 정해졌지만 둘을 떨어뜨려놓지 못했다. 조례를 할 때나 체육시간에 내 바로 뒤에는 늘 민정이 있었다. 둘의 단짝 관계는 필연이었다.
둘의 사이는 제법 견고해서 어느 누구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다. 싸운 적이 한두 번 있긴 했지만, 하루 이틀 정도의 침묵 후엔 여느 때처럼 지냈다. 둘 다 성질이 격하지도 못했다. 감정이 상한 부분에 대한 활발한 대화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그저 각자의 뇌가 갖고 있는 화해 구조 속에 갈등이 녹아내리는 형국이었다. 민정은 화가 나면 며칠 동안 냉담해져 있다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나는 민정이 토라진 이유도 모른 채 다시 예전처럼 관계를 이어갔다.
반면, 내가 민정에게 서운할 때는 화를 내거나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지만, 민정은 그때마다 나를 피했다. 그러고 보면 수년간 그렇게 지내오면서도 우리 사이엔 그 깊은 서정적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간단한 유머나 농담, 일상적인 대화가 전부였다.
격앙된 일이 있으면 얼굴 한가득 드러나는 나와 달리 민정은 절제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내가 조금의 스트레스를 풀려고 할 때는 다수의 상대와 격렬한 수다로 공유해야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사람을 갈구하거나 외로워 보인 적도 없었다. 나는 놀라우리만치 통제력이 강한 그녀를 보면서 나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이 민정을 용의자로 지목한 결정적 계기는 우철이 민정에게 보낸 “집에서 얘기하자!”라는 마지막 메시지였다고 한다. 실제 사건 현장에는 술잔 두 개가 발견돼 우철이 누군가와 함께했음을 짐작케 했다. 술잔에서 검출된 수면제는 부검 결과 우철을 해한 성분과 똑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술잔에 묻은 지문은 민정의 것이었으니 추리의 여지도 없었다. 형사 과장은 민정을 용의자로 확신했고, 그 뒤로도 나를 수시로 찾아와 민정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