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후 그 건물을 갔을 때 건물 전체는 입점을 끝낸 상태였다. 민정이 있는 약국을 슬쩍 들여다보니, 손님들로 북적였다. 민정은 직원도 그새 두 명이나 고용한 듯했다. 오전을 분주하게 보낸 탓에 나는 허기를 느꼈고, 무작정 바로 옆 식당에 들어갔다. 37.5라는 이름의 유럽 스타일의 노천카페였는데, 가을볕을 느끼면서 쉬기엔 제격이었다. 한참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이 샐러드와 커피가 내 앞에 차려졌다. 영업인들에게 혼밥은 익숙한 것이었지만, 그날의 브런치는 꽤 쓸쓸했다.
나는 급기야 5년 전 밀봉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학 때 공무원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지자 나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대뜸 이탈리아행 티켓을 끊었다. 인터넷 동호회에서 만난 6명의 청춘들과 함께 하는 30일간의 여행이었다. 남자 셋, 여자 넷. 그 수는 커리어는 계획하지 못해도 연애를 계획하기엔 황금비율이었다.
멤버 중 내가 좋아했던 남자는 다소 수다스럽고, 유머가 많았다. 그와는 낮엔 스파게티를 같이 먹고, 밤새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베네치아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서 그와 하는 대화는 유쾌했다. 나는 부서지는 햇살을 마주하며 웃어댔다. 그때의 체온도 37.5도가 됐으려나. 그가 여행을 함께하던 다른 여자 멤버와 눈이 맞아서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동거를 했다느니 결혼을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면서 내 체온은 한동안 정상적으로 유지됐다.
씁쓸하기도 달콤하기도 한 상념들은 현실의 노천카페를 배회하다가 가을바람에 뿔뿔이 흩어져갔다. 상념들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어수선함이 다가왔다. 어디서 본 듯한 남자아이가 내 주변을 헤집고 다녔다. 이상한 건 아이 엄마의 태도였다. 여자는 아이의 움직임에 개의치 않고, 뭔가에 정신이 팔린 듯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아이가 도로 쪽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도 몰랐다. 나는 아이를 주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아이를 제지했다.
“차가 다니는 곳은 위험해”
“맞다. 우리 아빠도 차 때문에 죽었어요. 조심해야 돼요.”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가며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내게 다가왔다.
“아줌마는 여기 왜 왔어요?”
나는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호호. 난 아줌마가 아니란다. 아기야”
“저도 아기 아니거든요!”
“근데, 너는 여기 왜 왔니?”
“아저씨 일하는 데 왔어요. 요기 피부과요.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 될 사람이래요.”
여자는 급히 내게 와서 인사하고는 아이를 데리고, 카페를 떠났다. 잠시 후 나는 식사를 끝내고 사람들이 몰려올 때쯤 민정의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에는 그 여자가 민정에게서 약을 받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약국 안은 한산 했지만, 나는 여자를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밖에서 물끄러미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나오면 들어갈 참이었다.
여자는 민정에게서 약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민정과 심각한 표정으로 몇 마디를 나누더니 언짢은 표정으로 약국을 떠났다. 민정은 그 여자가 나가고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단지 하나의 투명한 유리문 사이로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세계가 공존하는 듯했다. 나는 그 세계로 가는 것이 참으로 긴장되고 고된 작업처럼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