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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Jan 03. 2022

조금 더 다정했었더라면...

 나는 꿈을 자주 꾼다. 아니, 잘 기억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꿈을 통해 나는 나의 심연을 바라본다. 어떤 꿈은 나를 치유하기도 하는 반면, 또 다른 꿈은 더 골이 깊은 상처의 기억으로 나를 이끌기도 한다. 꿈속에서 가끔 나는 만능 해결사가 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 것도 못하고 허우적대는 일이 많은 것 같다.   

 보통의 꿈이 그렇듯 나의 꿈도 매우 사소하고 단편적인 일상적인 이야기로 별 의미 없이 잊혀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반면, 잘 안 잊혀지고 기억되는 꿈은 수십년째 같은 인물이 등장하거나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꿈인데, 이것들은 매우 예전의 인연이나 사건인 경우가 대다수여서 현실에서 수정되기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번복될 수 없는 과거의 미련이나 회한 등은 나의 무의식에 잔여물을 남기고, 그 잔여물은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내 꿈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찌꺼기로 남아있는 감정이 해소의 방안을 열렬히 찾으려하기 때문일까? 당시 후회의 감정은 꿈에서 더 잔혹한 에피소드들로 재구성되어 내 미련이나 회한을 더욱 강화시킨다. 반면, 나는 간혹 꿈을 통해 다소의 치유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과거와는 다른 현재에서의 나의 성장이 감지됐을 때, 나는 과거의 어설픈 내가 아닌 현재의 나의 모습으로 꿈속에서 과거의 어느 순간에 놓이고, 그 당시에 내가 그 시기를 지나치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 시기를 극복해가는 것이다. 그 시기의 사람들과 불화했던 내가 아니라 그 시기의 사람들과 화해하는 나의 모습으로 나는 꿈에 있다.

 일상을 정지시키고, 나의 정신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다소간의 통증... 꿈에서도 무의식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서글픈 상흔들... 이쯤에서 나는 수십년간 내 꿈에 시간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몇 가지 것들을 고백해보려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그러니까 20년은 더 된 당시 같은 반 친구와 나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나 외향적이어서 쉬는 시간에 반 친구들 한명 씩은 다 살피고 다니고, 반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그 친구에게 내가 느끼는 내적 친밀감은 그닥 크지 않았지만, 활동반경으로 본다면 반의 다른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다. 식사 시간에 밥을 같이 먹는다거나, 일요일이 되면 교회를 같이 다니거나, 언니와 독립한 그 친구 집에 가보곤 했으니까.

 당시 그 친구는 고3 언니와 집을 나와서 작은 방에서 자취생활을 했었다. 부모님이 이혼했고, 언니가 그 어느 누구의 편에 속해 있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독립을 선언한 까닭이다. 나이에 비해 억센 그 친구도 언니를 따라 독립했었다. 신기한 건 그렇게 힘든 시기인데도 그 친구는 직접적으로 내게 감정을 털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의 감정을 숨기고 강한척 하기 바빴다. 밥을 같이 먹는 친구들도 대강의 상황만 눈치만 채고 있을 뿐 직접대고 물어볼 순 없었다. 그 친구는 쉬는 시간이 되면 종종 나의 손을 잡고 옥상에 올라가서 허공을 바라다보거나 교회에선 손을 잡고 기도하며 눈물을 흠뻑 흘렸었는데, 나의 존재가 위로가 되긴 했던 걸까? 당시 어린 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어떻게 하면 안 아프게 그 아이의 상처를 감싸줄 지 위로의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농담으로 휙 던진 말에 유난히 감정적으로 약한 시기의 그녀를 다치게 했던 기억이 있다.) 또 그러기엔 그 아이가 나에게 얼마나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었다. 그 아이의 나에 대한 호감도에 의문 내지 불만이 있었던 까닭에 나는 꼼생이처럼 넓은 마음을 보여주진 못했다.

 한 번은 그 말 많은 그 아이가 지나가다 툭 하고 아무렇지 않게 흘렸던 어떤 말이 있는데, 아직도 아프게 남아있다. "나는 결혼하면 절대 남편에게 목욕할 때 내 발가벗은 모습을 보이진 않을거야. 가릴 건 가리고 살 거야"라고.  20년 전의 그 말이 아직도 왜 이리 아프게 다가올까? 그리고 별 위로가 되지 못했던 친구로서의 나의 모습에 짙은 회한이 든다.  다시 만나면 '그때 제대로 된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당시 너무 어려서 너의 감정의 일부도 알 수 없었다'고 털어놓고 싶은데, 당시 나한테 서운한 부분이 있었다면 사과라도 하고 싶은데... 입시를 거치고 대학을 가면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다른 동창들보다 소원하고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상황도 그 아이와 나의 감정도 뒤죽박죽인 상태다. 친밀도와 호감도가 어땠는지 뭐라 말할 수 없는 관계. 그리고 너무나 오래된 일. 그 아이는 아마 기억조차 하지 못하겠지.

 다음의 에피소드는 대학 4학년때다. 동아리의 한 친구가 자살을 했다. 매일 연락을 하고 지내진 않았지만, 일주일에 한번 합평회를 하고 방학때도 학교에 가서 술자리 모임을 하고 만나거나 같이 연극을 보러가거나 밥을 먹기도 했었으니 그 아이의 자살 소식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 아이의 그런 선택에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몇 가지 복선이 있긴 했다. 애초에 우울과 방황이 심했던 아이였다. 방학때면 선배를 불러놓고, "죽고싶어요." "점쟁이가 그러는데 저는 23살을 넘기진 못한대요"라며 자신의 손바닥 생명선을 짚었던 그. 자취를 하던 그는 1학년때부터 종종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 F가 가득한 성적표를 받기 일쑤였다. 동아리방에 있다가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음식을 시켜먹고, 저녁이 되면 술자리(그는 유독 동아리 모임과 술자리에 적극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을 많이 그리워했던 것 같다.)에 가거나 자취방에 돌아가는 것이 그 아이의 생활이었다. 그러니 당시 나의 그 아이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한심함'과 '나약함'이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그런 감정은 그 아이와의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지장을 초래했다. 어느 날, 자정 쯤에 그 아이에게서 전화가 온 적이 있다. 고독한 시간 어쩌면 그 아이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었을 지 모르지만, 당시 무척이나 FM이었던 대학 신입생의 나는 그닥 친밀감도 없었고, 호감도도 낮았던 그 아이가 자정에 전화를 하니 다소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늦은 시간의 전화는 예의가 아니라는 핑계로 "넌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전화냐?"이러고 쌀쌀맞게 끊어버린 기억이 있다. 끊고 나서 가슴 한켠에 '내가 너무 매정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 그 아이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서 나에게 상처를 받으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도 컸다. '거리두기' 합리화를 하자면 당시 내가 그 아이를 대하는 '따뜻하기 위한 차가운 방식'이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너 그때 나 이후에 다른 애한테도 전화했지?" 라며 태연하게 미안함을 전했는데, 그 아이도 나의 미안함을 알았을까? 그렇더라도 서운하지는 않았을까?

  어느 날, 군에 갔던 그에게서 비보가 날아왔다. 군에서 복부의 충격으로 장이 파열되는 사고가 발생해 수술을 하게 됐다 것. 사고였는지 누군가의 가해였는지 불분명했지만, 정신적 상처가 컸을 것은 분명했다. 나는 동아리에 있던 다른 여자 동기와 문병을 한 번 갔다. 당시 나는 예의와 형식상 나는 그 정도면 그에게 친구로서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문병을 같이 갔던 동기가 어느 날, "우리 또 문병가자. 걔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 했지만, 나는 나름 그 아이와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고, 그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아이는 그 여자동기라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부했다.

 20년이 지난 날에도 나는 여전히 그 아이가 드문드문 생각난다. 그 아이가 의가사 제대를 하고 병원에 후송되어 올 때가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였을까? 눈이 내리는 어느 날, 난 몇 시간 동안 커피숍에서 창가를 바라보다보니 어느덧 그 아이가 떠올랐고, 난 정지해버렸다. 감정의 힘은 강하다. 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몇 가지 생각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그 날, '그 아이가 나를 알고 있었던만큼, 나는 그 아이를 잘 알고 있었을까?', '그 아이에게 조금 더 친절했었다면... 조금 더 다정했었더라면....' 나 하나의 힘으로라도 어쩌면 그가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을까?'라는 말도 못할 안타까움을 내리는 눈과 함께 꼭꼭 쌓아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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