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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Jan 17. 2022

쉽게 바뀌지 않는 것

"너는 정말 쉽지 않구나!"

친구가 원한 건 '위로'였다. 동의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면 차라리 들어주는 것. 그건 친구가 그동안 수차레 내게 강조해오던 것이기도 했다. 친구는 몇 번이고 내게 공감을 얻지 못해서 기분이 상했을테지만 관성처럼 이번에도 내게 속상했던 마음을 털어놓았고, 나는 위로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공감은 커녕 그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각박한 세상이 아니더라도 '공감'과 '위로'는 관계를 이어나가는 힘이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이 부분에서 상대와 무수히 많은 오해를 쌓아왔다. 어찌보면 이제까지 나의 분절된 관계의 대다수는 그러한 나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상대가 침묵을 바랄 때 의견을 냈고, 깊은 상처를 털어놓았을 때 아픈 진실이나 해결책을 말해주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정녕 나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상대의 아픔에 별 관심이 없는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정말이지 진실로 나는 타인의 아픔에 관심이 많다.(다른 식으로 말하면 오지랖이 꽤 넓다.) 아픔을 해결해주고 싶은데는 더더욱 관심이 많다.(본의아니게 간섭을 할 때도 있다.) 그리고 타인의 아픔에 대한 감정이 꽤 오래가는 편이다.(하루종일 그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때도 있다.) 더구나 MBTI 검사에서는 F가 나올 때가 많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면 내가 상대를 위한다고 하는 방식이 아주 오래 전에 그렇게 내게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던 것 같다. 현재의 상황을 이겨나갈 가장 옳은 말을 해주는 것. 그 말은 당장은 사무치도록 아플지 모르지만 냉철하게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스스로를 강하게 해주고, 과한 감정 낭비를 방지해주며, 어쩌면 오만할지라도 그 사람의 인생에 바람직한 로드맵을 제시해준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이건 내 어머니가 아주 오래 전부터 내게 해주던 방식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와서 잔뜩 움츠러져있을 때 어머니는 내게 "힘들었지?", "괜찮아!"라는 위로 대신 "네가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서운함이 덜하다"라는 말을 건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위로를 듣고 자랐으니 오은영박사가 들으면 어쩌면 기겁할지도 모를 일) 이상하게도 이러한 역지사지의 위로는 마법같았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가 된 시점이 되자, 오히려 내 자신이 옹졸하게 느껴지면서 서운함이 사그라들었다. 나의 마음은 그러면서 서서히 자라났다. 나는 그런 과정을 통해, 다른 친구들에 비해 웬만한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쉽게 헤아릴 수 있게 됐다고 믿는다.   

 물론, 그 위로법은 위로하는 사람이 나를 진실로 생각한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 말에 동의를 해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남의 편', 자기 말에 동의를 해주는 사람에게는 '나의 편'이라고 단순 규정하는 세계에서는 그 위로를 하는 것은 되려 상처받기 십상인 사고방식인 셈이다. 그리고 무척 슬픈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실로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내가 하는 말들은 스스로 '남의 편'이길 자초하는 말로 인식될 뿐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마음을 닫게끔 했다. 내겐 그토록 상대를 생각해서 했던 진실된 말들이 상대에겐 오히려 사기를 꺽고, 가시가 되는 말이 될 수 있었다.

 성인이 되고, 이 세계의 많은 법칙들을 알고나서 나는 함부로 '나의 진실'을 말하진 않는다. 나의 진실이 상대에겐 진실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고사하고, '참된 친구는 욕을 먹을지언정 진실한 충고를 한다'는 성현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먼저 작금의 세상엔 진실한 관계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사라진 것 같다.

 나는 그 예전 어머니가 해왔던 '역지사지의 위로법'이 얼마나 구시대적인지 모르는 바 아니다. 어머니의 위로법엔 상대의 다친 마음에 대한 '지지'가 부족했다. 위로가 필요한 이의 마음이 아무리 옹졸하고, 이기적이더라도 상대의 감정이 벅차오른다면 잠시 들어주고, 침묵해보는 것. 어질어질한 상대의 감정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잠시 쉬어갈 순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더 그 상대가 그토록 그 순간에 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굳어진 뇌 매커니즘은 가까운 사이에서 더더욱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상대의 감정이 쉬어갈 순간을 마련해주지 않고, 나의 진실을 말하기에만 급급한 것이다. 그리고 감정보단 어떻게든 해결법을 제시해주기 위해 급급한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닌데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팩폭을 날리거나 해결법에만 전전긍긍한다. 관성처럼 반복되는 이것들을 나는 어리석게도 '어찌할 수 없다'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 불운이 나의 어머니에게서 온 것인지, 애초에 나의 기질이 이런 것인지 나는 구분하는 법을 모른다. 아무튼 내가 좀 더 가까운 관계에서 이런 경우 신중해질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상대를 위한 방법이라도 하더라도 괴로워하는 상대를 더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다. 더 솔직히 밝힌다면, 이제는 나의 진실을 상대를 생각한다는 명목으로 도리어 나를 괴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특히나 나의 이런 마음을 일부도 모르는 이들에게 더이상 욕 먹기는 더더욱 싫어졌다. 그러면서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진실을 쉽게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로인해 상처받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또 방금 전 힘들다는 친구에게 거짓을 말하지 못하고, 팩폭을 날리고 말았다. 단지 아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신중해지는데, 가까운 사이이거나 마음을 많이 뺏긴 상대에게는 관성처럼 지속되는게 문제다. 정말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정말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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