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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Mar 04. 2022

프롤로그

 어찌하다 보니 마흔이 되어버렸다. 이쯤되면 불혹(不惑)의 뜻처럼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여전히 불명확하고 엉성한 것 투성이다.

 한때는 꿈과 이상을 쫓아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한 순간 한 순간을 분주히 움직이던 시절도 있었고,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것들을 어떻게 해소해야할 지 몰라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시기도 있었다. (그땐 굳이 적극적으로 해소하지 않는 순간에도 내 안의 무언가가 사정없이 보여졌다.) 사회적 활동이 거의 없고, 열정이 갈 길도 확실치 않은 지금은 그저 '과거'가 남긴 풀리지 않은 것들, 수치스럽거나 후회되거나 그립거나 아쉬웠던 각종 감정을 가지고 노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아른거리는 기억과 감정들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잊혀지면 덜 부끄러울까?',  '차가워지면 덜 아플까?', '그러면 다시 뜨거워질 수 있을까?' 되뇌이면서. '그러므로 나의 미래에는 과거의 나보다 진보한 내가 활약하고 있을까?'라고 기대하면서.

 10년째 사회생활과 단절 중인 삶. 이른 아침이면 보송보송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늦은 밤엔 하룻동안 겹겹이 쌓인 육아 스트레스와 피로를 잠 속에 밀어넣는 일상을 하염없이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사회생활을 할 때보다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운하게 아침에 일어난다는 게 이전 삶보다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아직 유아티를 못 벗은 아이들과 하는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라고 해봤자, 아이들의 투덜거림에 대한 일시적인 짜증이나 부정적인 기질에 따른 피곤함 따위니까. 꺼이꺼이 덧붙이자면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지루함 정도. 이른 아침, 나는 '어떻게 하면 식구들 입 속에 요령껏 영양분을 집어넣을까?'를 고민하며 아침을 준비하고, 졸려서 투정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내 감정을 최대한 자제해보려하고, 집에 아이들이 오면 둘이서 세상 자유롭게 노는 광경을 슬그머니 지켜보며 뿌듯해하다가, '저녁도 골고루 먹여야지'하며 주방일에 몰입하다가, 드글대는 학부모의 욕망으로 미뤄둔 공부를 시킨다.

 자기계발 측면에서 보면, 텅 비어버린 10년이다. 커리어는 중단됐고,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부대끼며 쌓아가게 되는 인간관계의 기술은 나와 먼 얘기가 되어 버렸고,  네트워크도 그다지 확장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거울을 보면 어느새 흰머리는 삐죽삐죽 돋아있고, 잔주름이 보이는데... 이대로 밥만 하다 죽을 것인가? 내 밥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내 이후를 이어간다면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쯤되니 기존에 나를 출렁이게 하게 만든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제껏 내 삶을 이어온 동력이랄까? 매일 성실하게 내 임무를 수행하는 나를 이끌고 나가는 힘에 대해서. 단지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있기 전에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나를 확장하고 싶은 욕망에 대해서. 누군가를 가슴저미게 하거나 깨닫게 하는 등 누군가에게 소소하지만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존재로 기억될 짜릿함에 대해서. 그리고 태초부터 머물러 있고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내 안의 흉터들에 대한 인식, 과거의 수치스러운 일화에 관한 후회내지 변명에 대해서.

 젊음보다는 늙음과 가까워지는 나이, 그러나 불온전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인 나이. 나는 여전히 출렁이고 싶고, 못다한 것들에 대한 욕구에 대해서 그러고 싶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쯤해서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파악해보고 싶어졌다. 이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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