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향지 Mar 04. 2022

자식 사랑의 본질은 이기심?

 며칠 전 아이 유치원 재롱잔치에 갔다. 꽤 오랫동안 준비한 무대라서 끝나면 맘껏 환호해 줄 요량으로 꽃다발을 준비한 채 나의 마음은 약간 상기됐던 것 같다. 아이 유치원 재롱잔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내심 기대가 됐다. 얼마나 무대에서 귀엽게 해 줄 것인지, 작년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성장했을 것인지...


 하지만 기대가 컸던 걸까? 무대에 막이 오르고 무대 배열을 보는 순간 기분이 와장창 깨졌다. 50여 명 정도가 모여있는 율동 무대에서 내 아이의 자리는 한쪽 끝이었고, 그것도 반에서 지나치게만치 키가 큰(또래보다 4살 정도 앞서간) 아이 옆이었다. 키를 무시하기엔  내 아이는 너무 작았다. 반에서 가장 작은 정도였고, 늘 "나는 왜 키가 이렇게 작지?"를 입에 달고 사는 아이였으니까. 어떤 이유로 저런 말도 안 되는 배치가 가능할까 머리를 굴려보며 나는 중얼댔다.


"왜 하필 저 말단 비대증 같은 아이를 옆에 세워둔 거야?"

나는 순간 나의 폭력성에 놀랐다. 고작 6살짜리 순수한 아이에게 말단 비대증이라니.... 자책이 될 정도였지만, 무대를 본 나의 감정은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 카메라로 아이에게 초점을 맞췄다. 전체 샷으로 찍어야 내용이 이해되고 뭔가 멋있을 뮤지컬 무대였지만, 그걸 다 담으면 내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오프라인 뮤지컬 무대를 핸드폰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주시했다. 내 카메라 렌즈 속의 아이는 화면에 가득 찼고, 중심이었다. 나는 내 아이에게 맞는 최대의 샷을 위해 다른 아이를 그 시야에서 자르기도 했다.


 나는 오프라인의 현장에서 온라인으로 동영상 촬영을 하며 계속 생각했다. "저 짝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지어진 걸까? 보통은 비슷한 키의 친구들끼리 짝을 하지 않는가? 생각해보니 연습기간 중 그 키 큰 친구와 짝을 하기 싫어 짝이 여러 번 바뀌었다는 것 같았는데... 그게 혹시 다른 엄마들의 입김 때문이 아니었을까?" 설령 나의 생각이 망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도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실제로 많은 엄마들이 자기 아이가 중심이 되도록, 자기 아이가 남들보다 우월하도록,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기는 죽지 않도록, 피해보지 않도록 신경 쓰고 사니까.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 애초부터 다른 아이와의 비교를 통해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다. 보통의 부모는 그렇다. 내 아이는 그 자체로 사랑스럽다. 비록 태어날 때 이목구비가 평균 이하라고 할 지라도, 아이가 별나서 부모를 힘들게 할지라도 그건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의 마음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화를 시작한 아이는 사람들의 폭력적인 시선에 이리저리 치인다. '못 생겼다. 느리다. 성격이 별로다. 멍청하다' 등.  그런 평가는 분명 타인에 의한 기준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 평과도 동시에 부모들은 서서히 '비교의 늪'에 빠진다. 더 똑똑하게, 예쁘게, 깔끔하게, 성격 좋게 키우고 싶어서 악착같아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모든 행위가 비교와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순수하게? 개뿔, 그런 거 집어 치자. 아니, 더 솔직해지자. 정말 이런 게 타인과의 더 비교 없이 오로지 아이의 행복을 위해 가능한 일이라고? 아니, 좀 더 깊어져 보자.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아이는 수많은 또 다른 아이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다. 소유욕이 강한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없는 장난감에,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낮은 성적에,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는 사랑 표현을 덜 하는  다소 이성적인 부모에... 모두 타인에 의해 설정된 기준들에 의한 결과다. 뭐, 이런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결핍과 상처를 통해 아이는 성장하는 거라고, 그러니 크게 신경 쓸 게 못된다고 한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아이는 너무 여리고 작은 존재다. 성향에 따라 크게 작게 상처받는다. 섬세한 아이라면 유치원에 가져간 물통 색깔과 디자인 하나로도 그날 하루가 아니 평생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성향을 조금씩 교정하고, 그런 경험을 통해 단단해져 가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귀결이지만, 그 과정에서 쿨 할 수 있는 부모와 아이가 과연 얼마나 많을까?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가 여러 다양한 이유로 '함께'에 배제되거나 피해를 볼 때 가만있을 부모는 없다. 만약 불가피하게 누군가를 눌러야 우리 아이가 피해를 안 보는 상황이 온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부모는 부지기수일 것이라고 나는 장담한다.


 나는 무대에 올라간 아이의 배치를 보면서 대략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부모구나. 그리고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이기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구나. 앞으로 주어진 먼 학업의 길에서 우리 아이를 도태시키지 않기 위해 '경쟁'이라는 구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구나.


 부모의 길은 결코 성인군자처럼, 고고할 수가 없구나. 나는 비록 성인군자처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는 캐릭터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를 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는 또 다를 수 있다. 자신보다 더 다정하고, 더 보호하고 싶은 대상인 것 같다. 그게 다정함일까? 사랑인 걸까? 바람직한 걸까? 모르겠다. 다만 자식에게 더 다정한 나는 타인에게 더 잔인한 내가 되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