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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Jun 09. 2022

딸의 사춘기... 엄마와의 애증은 시작되고

벌써 주변에서만 세 번째다. 사춘기 절정의 중학생 아이가 학교를 가기 싫어한다는 것. 그동안 별 무리 없이 잘 지낸다고 생각했던 아이인데 어느 날부터 방문을 걸어 잠그더니 대화는커녕 부모에게 인사도 안 한단다. 부모는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해보지만 반항기가 넘치는 아이와 관계가 더 틀어질까 대화조차 무섭다. 문을 열고 들어가 겨우 뒤져본 일기장엔 인생에 대한 낙담과 절망의 글이 한가득이고, 군데군데 '죽고 싶다'는 충격적 표현까지 있다.


그맘때부터일까?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내려놓기를 연습하는 것 같다. 자녀에게 '도른 자', '미친놈'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부모로서 어떻게 그런 격한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싶지만, 어찌 보면 사춘기란 부모 입장에서도 자녀로부터 독립을 하는 시기이니 자녀를 지칭할 때 신개념의 용어(?)가 필요한 것 같다. 이제 홀로 설 준비를 하는 자녀를 나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고, 내가 조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정의하는 명칭 말이다.   


1.

돌아보면 나의 사춘기는 최강급이었던 거 같다. 정신병원에 가기 일보 직전의 상태. 아니 거기에서도 어쩌면 해결이 안나는 정도였다고나 할까? 감정은 우울하고, 생각은 터질 것 같고, 책은 손에 잡히지 않고...


엄마와 방문을 사이에 두고 격렬한 대치를 한 적이 많았다. 혼자만의 시간과 해결이 필요한 나이인데, 불안이 심한 엄마는 내 방문을 시도 때도 없이 열고 들어왔고, 심지어 이성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는 것까지 엿들었다. 방을 피해 베란다로 나가면 베란다까지 몰래 뒤따라와 그 내용을 들을 정도였다. 이런 집이 너무 답답해서 새벽에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가면 엄마는 뭐가 불안한지 나가는 문소리에 깨서 따라 나왔다. 우리 엄마는 도대체 자식을 분리시킬 이유와 방식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사이가 좋던 엄마와의 관계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엄마의 자상함이 극심한 간섭으로 느껴지고, 엄마의 삶에 대한 애처로운 감정이 여린 내 감정에 대한 학대로 돌아왔고, 엄마의 결핍이 내게 그대로 와서 나를 들쑤셨다. 나는 내가 마음에 안들 때마다 엄마를 괴롭혔다. 드문드문 응어리진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평생 해보지도 않은 엄마 탓을 했다.


엄마는 아직도 엄마 육아에서, 아니 엄마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로 나의 사춘기를 꼽는다. 엄마마저 이상하게 만들 정도로 스트레스의 강도가 높았던 시기. 한 번도 속 썩이지 않았던 착하디 착한 딸의 반항. 엄마는 이제껏 기세등등했던 자신의 육아가 예상치도 못한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자 "자식에게서 받는 고통의 총량은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고 한다.   


내가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노는 것이었다. 나는 몇 개월 간을 놀고, 또 놀았다. 물론 해소가 완전히 되진 않았다. 쉽게 바뀌지 않는 나와 엄마의 성격은 머리로는 이해가 돼도 감정적으로 풀리지 않는 것들이라 어쩌면 무덤 속까지 가져갈 수도 있는 것이었다.



2.

사춘기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은 종종 엄마와 대화를 할 때마다 내 무의식에서 튀어나와 둘의 관계에 부스럼을 만든다. 엄마와의 싸움은 존재와 존재와의 합리적 대결이라기보단 엄마에 대한 내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한 일방적인 공격일때가 많다.  


- 섬세한 어린 나를 억압했던 엄마의 직선적인 기질. 생활에 여유가 없어서 발생하는 옛날 엄마들의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지시와 통제의 언어들.


- 마치 도그마처럼 내게 주입되 엄마의 생각들. 알고 보면 도덕도 상식도 아닌 엄마의 지난한 과거의 상처에서 발생한 비뚤어진 생각들.

"사람에게 너무 잘할 필요 없다. 상처받는다."

"다른 사람에게 네 속마음을 말하지 말아라."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라."

(나는 왜 그런 헛된 것들을 품고 내 몇십 년을 낭비했나? 나는 비판의식도 부족한 바보였나?글고보니 엄마는 집안에서 신적인 존재였다. 난 성장기에 그 누구도 엄마에 대해 나쁜 소리를 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난 부모 외의 살아있는 어른에게 내 개인적 고민에 대해 정신적 지지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 나는 감정 쓰레기통인 건가? 아빠에 대한 증오와 지난 삶에 대한 후회를 왜 내게 말하나? 내게 왜 동조와 위로까지 바라는 건가? 그토록 말해도... 아빠의 자식으로 존재하는 내 입장은 왜 헤아려보려 하지 않는 건가?  마치 습관 같은 엄마의 한탄의 언어들. 난 엄마에게서 제발 기쁨의 언어를 듣고 싶어요. 왜 엄마의 지난 인생은 한과 남 탓으로만 가득 차 있는 걸까요? 내가 엄마의 웃는 얼굴을 많이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사진에서 조차 엄마는 웃질 않아. 물론, 살아보니 엄마도 살아내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 자신조차 감당되지 않았는데 짐이 너무 많아 버거웠겠지.


- 내 영역을 침입하는 엄마의 말과 행동들. 난 그래도 괜찮아하는 동생들과는 다르단 말이에요. 제발 날 얽매이지 말아줘요. 내 의견과 상관없이 엄마의 의견대로 끌고가지 말아줘요.


- 자식이 잘 되길 바라면서도 엄마가 그 자식 위에 있길 바라는 마음. 과거에도 지금도 가족에게서 엄마 자신이 신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엄마의 자아실현 방법)이 보이는 건 비뚤어진 내 관점뿐인 걸까? 그건 모든 부모가 그럴까? 자존감 약한 부모들만의 특징인 건가? 제발 존중하고 싶어요. 존중하게 해 줘요! 


엄마도 사람이다. 부족하고  약한. 난 뭘  더 바라길래 아직까지 남아있는 못마땅한 감정에 퉁퉁거리는지... 아직도 드문드문 나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근본을 엄마에 두고 있는지... 어린 시절 하지 못한 징징댐의 욕구가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건가? 왜 아직도 징징거리는 건지. 40이 넘어도 감정의 문제는 쉽지가 않다.


3.

입장과 상황에 따라 감정과 행동은 변한다.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이 사춘기가 되면 나 또한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안다. 사춘기의 의미와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질풍노도의 딸에게 조금의 신변의 위협이라도 가해지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에서 어떤 부모가 자유로울 수 있으랴?


이성적으로야 자녀의 세계를 존중해 주고, 한 인격체로서 거리를 둬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아직 온전히 여물지 않은 존재'를 덤덤히 믿고 바라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사춘기의 발광이 심했던 탓에 나는 종종 그 업보가 내 아이들에게로 갈까 봐 두렵기도 하다. 아이들은 나와 엄마의 싸움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고 자랐다. (엄마와 싸우고 엄마에게 지르다가도 세상 그 누구보다 자상하게 엄마를 챙기고 마음을 헤아려주는 내 마음조차 딸들이 보았을지는 모르지만.)


내 딸들의 사춘기가 두려워서 난 아이를 최대한 억압하지 않고 키우려고 했지만, 육아의 문제에서 그건 쉽지 않다. 나 또한 바른 말하길 좋아하는 엄마를 닮아서 딸들의 행동이 정도에 벗어나면 어느 순간 직선적인 언어로 누르게 된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엄마의 기질이건만, 나도 참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어느새 그런 내 모습을 긍정하고 있다. 나, 성장한건가?


모녀 관계는 애증의 관계라고 하는데, 나의 엄마에 대한 애증은 사춘기를 시작으로 이어져왔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내가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엄마를 이해 못 하다가 다시 이해하던 것들이 생기다가 감정적으로 해소되다가 현재의 관계에서 다시금 쌓이는 걸 반복하다가 과거 엄마 탓을 했던 나를 원망도 했다가 그런 나를 애처로워했다가 과거의 엄마도 나도 보듬기도 했다가 한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겐 늘 고마운 분, 세상에서 가장 날 생각하는 분이니 우리의 관계가 '애증'이 아니라 '증오가 빠진 애정'으로만 가득 찰 날이 있기를 꿈꿔보면서 지금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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